영재 이건창의 생애와 업적
2015.12.04 18: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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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 이건창의 생애와 업적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辛相龜)
1. 이건창의 생애
이건창(李建昌)은 조선말 문신과 학자로 철종 3년인 1952년에 개성의 전주이씨 가문에서 증이조참판 상학(象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兒名)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 또는, 봉조(鳳藻), 호는 영재(寧齋)이다.
조부 이시원(李是遠)은 개성유수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건창은 조부가 개성유수로 재직할 때 관아에서 태어나 출생지는 개성이나 선대부터 강화에 살았다. 조부로부터 충의(忠義)와 문학(文學)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學)의 가르침을 받았다. 5세에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장성한 뒤에는 모든 공사(公私) 생활에서 조부의 영향을 받았다.
용모가 청수(淸秀)하였으며, 천성이 강직해 부정·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고 친척·친구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처단하였다. 강위(姜瑋)·김택영(金澤榮)·황현(黃玹)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양보가 없이 소신대로 대처하는 성격이어서 인심 포섭에는 도리어 결점이 되기도 하였다. 정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충간(忠諫)과 냉철 일변도의 자세는 벼슬길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1866년(고종 3) 조선 과거 사상 최연소 15세의 어린 나이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너무 일찍 등과했기 때문에 19세에 이르러서야 홍문관직에 나아갔다. 187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발탁되어 청나라에 가서 황각(黃珏), 장가양(張家?), 서보(徐?) 등과 교유,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충청우도암행어사가 되어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의 비행을 낱낱이 들쳐내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고, 1년이 지나서 풀려났다. 공사(公事)에 성의를 다하다가 도리어 당국자의 미움을 사 귀양까지 간 뒤에는 벼슬에 뜻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이 친서로 “내가 그대를 아니 전과 같이 잘 하라.”는 간곡한 부름에 못 이겨, 1880년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갔다.
이 때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흉년을 당한 농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식량문제 등 구휼에 힘썼다. 한편, 세금을 감면해 주어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어 그의 선정비(善政碑)가 각처에 세워졌다.
그 뒤 어버이상을 당해 6년간 상례를 마치고 1890년 한성부소윤이 되었다. 당시 청국인과 일본인들이 우리 백성들의 가옥이나 토지를 마구 사들이는 것을 방관하는 사이에 그 규모가 점차 커지고 있었다. 그들이 소유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문제를 일으킬 것을 예측한 그는 시급히 국법을 마련해 국민들의 부동산을 외국인에게 팔아넘기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실시해야 한다는 소를 올렸다. 그 때 이홍장(李鴻章)의 부하인 청국공사 당소의(唐紹儀)가 한성소윤의 상소내용을 알고, 공한으로 “청국사람과의 가옥이나 토지매도를 금한다는 조항이 조약상에 없는데 왜 금지조치를 하려는가.”라고 항의하였다. 그는 “우리가 우리 국민에게 금지시키는 것인데 조약이 무슨 상관인가.”라고 일축하였다. 그러자 당소의는 이홍장의 항의를 빙자해 우리 정부에 압력을 가해 금지령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념하지 않고, 외국인에게 부동산을 판 사람을 다른 죄목으로써 다스려 가중처벌을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감히 외국과 매매를 못하였고 청국인들도 하는 수 없이 매수계획을 포기하였다.
1891년 승지가 되고 다음 해 상소사건으로 보성에 재차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93년 함흥부의 난민(亂民)을 다스리기 위해 안핵사(按?使)로 파견되어 관찰사의 죄상을 명백하게 가려내어 파면시켰다.
임금도 지방관을 보낼 때에 “그대가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공무를 집행하는 그의 자세는 완강하고 당당하였다.
갑오경장 이후로는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의 협판(協辦)·특진관(特進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96년 해주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극구 사양하다가 고종의 노여움을 사 마침내 고군산도(古群山島)로 세번째 유배되었다. 특지(特旨)로 2개월 후에 풀려났다.
그 뒤 고향인 강화에 내려가서 서울과는 발길을 끊고 지내다가 병약하여 2년 뒤인 1898에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96년 강화도 사기리에 이건창 생가가 복원되고, 1997년에 한국문학비건립동우회가 이건창 문학비를 건립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2. 이건창의 사상과 학문적 업적
영재 이건창은 대문장가로 송대(宋代)의 문호인 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정제두(鄭齊斗)가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풍을 세운 이른바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학문태도를 실천하였다. 그리하여 전 연세대 교수인 민영규는 영재 이건창을 강화학파의 마지막 종장으로 평가했다.
그는 양명학자로서 심학(心學)의 의미를 강조하여 정치 ·경제도 그것에 기반을 두고 허명(虛名)을 배격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웃나라에서 부강을 구하는 비주체적 개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한말의 대문장가이며 대시인인 김택영(金澤榮)이 우리나라 역대의 문장가를 추숭할 때에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라 하여 아홉 사람을 선정하였다. 그 최후의 사람으로 이건창을 꼽은 것을 보면, 당대의 문장가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대(全代)를 통해 몇 안 되는 대문장가의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재 이건창에 문장은 시대를 위해 써야하고, 시는 현실의 문제를 위하여 써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권력자의 죄상을 성토하는 데에 추상같았고, 그의 시는 약자의 고통을 뼈에 사무치게 드러냈다. 그가 1878년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농민들의 참상과 관리들의 패악질을 눈으로 보고 쓴 장시 <전가추석>과 수탈을 피해 산중으로 숨어든 화전민에게 닥친 재앙을 전하는 <협촌기사>는 그의 애민 정신이 잘 나타나 가슴을 후벼 판다. 그리고 강화도 이웃에 살았지만 평생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짚신장이의 죽음 앞에서 매장할 땅을 내어주고 쓴 <유수묘비명>의 명문은 그의 인간존중 정신과 문장의 한 절정을 보여준다.
유수묘비명
오곡이 풍성한 것은 백성들이 보배로 여기나 / 五穀??民所寶
알맹이는 거두어 먹고 짚은 버렸네 / 斂精食實委枯槁
유씨 노인 이것으로 일생을 마쳤으니 / 惟?得之以終老
살아서는 신을 삼았고 장사 지낼 때에는 거적에 싸여 갔네 / 生也爲?葬也藁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성품이 매우 곧아 1866년 병인양요 때에 강화에서 동생 이지원과 함께 치시량의 간수를 마시고 자결한 조부 이시원의 유지를 받들어 개화를 뿌리치고 철저한 척양척왜주의자로 일관하였다. 그는 대쪽같은 기개와 신념으로 불의와 타협을 거부한 전통시대 관아의 모범이었다. 실제로 그는 일평생 강직했고, 직언을 잘하여 세 번이나 유배되었다. 권력에 비판적이었으며 민생의 실상과 어려움을 많이 다루었다.
저서로는『명미당집(明美堂集)』·『당의통략』 등이 있는데,『당의통략(黨議通略)』은 파당을 초월하고 문벌을 초월해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1. 金澤榮,『숭양기구전(崧陽耆舊傳)』, 1920.
2. 국사편찬위원회,『매천야록(梅泉野錄)』, 탐구당, 1971.
3. 권오돈,「이건창전집해제(李建昌全集解題)」,『이건창전집(李建昌全集)』, 아세아문화사, 1978.
4. “이건창”,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지식백과, 2015.12.2.
5. 곽병찬, “이건창, 참 보수주의자의 통곡”, 한겨레신문, 2015.12.2일자. 29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지역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한국선도의 맥을 이은 일십당 이맥의 괴산 유배지 추적과 활용방안” 등 6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1. 이건창의 생애
이건창(李建昌)은 조선말 문신과 학자로 철종 3년인 1952년에 개성의 전주이씨 가문에서 증이조참판 상학(象學)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兒名)은 송열(松悅). 자는 봉조(鳳朝) 또는, 봉조(鳳藻), 호는 영재(寧齋)이다.
조부 이시원(李是遠)은 개성유수와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건창은 조부가 개성유수로 재직할 때 관아에서 태어나 출생지는 개성이나 선대부터 강화에 살았다. 조부로부터 충의(忠義)와 문학(文學)을 바탕으로 한 가학(家學)의 가르침을 받았다. 5세에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장성한 뒤에는 모든 공사(公私) 생활에서 조부의 영향을 받았다.
용모가 청수(淸秀)하였으며, 천성이 강직해 부정·불의를 보면 추호도 용납하지 않고 친척·친구나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처단하였다. 강위(姜瑋)·김택영(金澤榮)·황현(黃玹)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양보가 없이 소신대로 대처하는 성격이어서 인심 포섭에는 도리어 결점이 되기도 하였다. 정사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충간(忠諫)과 냉철 일변도의 자세는 벼슬길에 많은 지장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1866년(고종 3) 조선 과거 사상 최연소 15세의 어린 나이로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너무 일찍 등과했기 때문에 19세에 이르러서야 홍문관직에 나아갔다. 1874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발탁되어 청나라에 가서 황각(黃珏), 장가양(張家?), 서보(徐?) 등과 교유, 이름을 떨쳤다.
이듬해 충청우도암행어사가 되어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의 비행을 낱낱이 들쳐내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고, 1년이 지나서 풀려났다. 공사(公事)에 성의를 다하다가 도리어 당국자의 미움을 사 귀양까지 간 뒤에는 벼슬에 뜻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임금이 친서로 “내가 그대를 아니 전과 같이 잘 하라.”는 간곡한 부름에 못 이겨, 1880년 경기도암행어사로 나갔다.
이 때 관리들의 비행을 파헤치고 흉년을 당한 농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식량문제 등 구휼에 힘썼다. 한편, 세금을 감면해 주어 백성들로부터 인심을 얻어 그의 선정비(善政碑)가 각처에 세워졌다.
그 뒤 어버이상을 당해 6년간 상례를 마치고 1890년 한성부소윤이 되었다. 당시 청국인과 일본인들이 우리 백성들의 가옥이나 토지를 마구 사들이는 것을 방관하는 사이에 그 규모가 점차 커지고 있었다. 그들이 소유권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문제를 일으킬 것을 예측한 그는 시급히 국법을 마련해 국민들의 부동산을 외국인에게 팔아넘기지 못하도록 금지령을 실시해야 한다는 소를 올렸다. 그 때 이홍장(李鴻章)의 부하인 청국공사 당소의(唐紹儀)가 한성소윤의 상소내용을 알고, 공한으로 “청국사람과의 가옥이나 토지매도를 금한다는 조항이 조약상에 없는데 왜 금지조치를 하려는가.”라고 항의하였다. 그는 “우리가 우리 국민에게 금지시키는 것인데 조약이 무슨 상관인가.”라고 일축하였다. 그러자 당소의는 이홍장의 항의를 빙자해 우리 정부에 압력을 가해 금지령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단념하지 않고, 외국인에게 부동산을 판 사람을 다른 죄목으로써 다스려 가중처벌을 하였다. 이에 백성들은 감히 외국과 매매를 못하였고 청국인들도 하는 수 없이 매수계획을 포기하였다.
1891년 승지가 되고 다음 해 상소사건으로 보성에 재차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893년 함흥부의 난민(亂民)을 다스리기 위해 안핵사(按?使)로 파견되어 관찰사의 죄상을 명백하게 가려내어 파면시켰다.
임금도 지방관을 보낼 때에 “그대가 가서 잘못하면 이건창이 가게 될 것이다.”라고 할 정도로 공무를 집행하는 그의 자세는 완강하고 당당하였다.
갑오경장 이후로는 새로운 관제에 의한 각부의 협판(協辦)·특진관(特進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하였다. 1896년 해주관찰사에 제수되었으나 극구 사양하다가 고종의 노여움을 사 마침내 고군산도(古群山島)로 세번째 유배되었다. 특지(特旨)로 2개월 후에 풀려났다.
그 뒤 고향인 강화에 내려가서 서울과는 발길을 끊고 지내다가 병약하여 2년 뒤인 1898에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96년 강화도 사기리에 이건창 생가가 복원되고, 1997년에 한국문학비건립동우회가 이건창 문학비를 건립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2. 이건창의 사상과 학문적 업적
영재 이건창은 대문장가로 송대(宋代)의 문호인 증공(曾鞏)·왕안석(王安石)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리고 정제두(鄭齊斗)가 양명학(陽明學)의 지행합일(知行合一)의 학풍을 세운 이른바 강화학파(江華學派)의 학문태도를 실천하였다. 그리하여 전 연세대 교수인 민영규는 영재 이건창을 강화학파의 마지막 종장으로 평가했다.
그는 양명학자로서 심학(心學)의 의미를 강조하여 정치 ·경제도 그것에 기반을 두고 허명(虛名)을 배격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웃나라에서 부강을 구하는 비주체적 개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한말의 대문장가이며 대시인인 김택영(金澤榮)이 우리나라 역대의 문장가를 추숭할 때에 여한구대가(麗韓九大家)라 하여 아홉 사람을 선정하였다. 그 최후의 사람으로 이건창을 꼽은 것을 보면, 당대의 문장가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대(全代)를 통해 몇 안 되는 대문장가의 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재 이건창에 문장은 시대를 위해 써야하고, 시는 현실의 문제를 위하여 써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문장은 권력자의 죄상을 성토하는 데에 추상같았고, 그의 시는 약자의 고통을 뼈에 사무치게 드러냈다. 그가 1878년 충청우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농민들의 참상과 관리들의 패악질을 눈으로 보고 쓴 장시 <전가추석>과 수탈을 피해 산중으로 숨어든 화전민에게 닥친 재앙을 전하는 <협촌기사>는 그의 애민 정신이 잘 나타나 가슴을 후벼 판다. 그리고 강화도 이웃에 살았지만 평생 얼굴 한 번 보지 못했던 짚신장이의 죽음 앞에서 매장할 땅을 내어주고 쓴 <유수묘비명>의 명문은 그의 인간존중 정신과 문장의 한 절정을 보여준다.
유수묘비명
오곡이 풍성한 것은 백성들이 보배로 여기나 / 五穀??民所寶
알맹이는 거두어 먹고 짚은 버렸네 / 斂精食實委枯槁
유씨 노인 이것으로 일생을 마쳤으니 / 惟?得之以終老
살아서는 신을 삼았고 장사 지낼 때에는 거적에 싸여 갔네 / 生也爲?葬也藁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성품이 매우 곧아 1866년 병인양요 때에 강화에서 동생 이지원과 함께 치시량의 간수를 마시고 자결한 조부 이시원의 유지를 받들어 개화를 뿌리치고 철저한 척양척왜주의자로 일관하였다. 그는 대쪽같은 기개와 신념으로 불의와 타협을 거부한 전통시대 관아의 모범이었다. 실제로 그는 일평생 강직했고, 직언을 잘하여 세 번이나 유배되었다. 권력에 비판적이었으며 민생의 실상과 어려움을 많이 다루었다.
저서로는『명미당집(明美堂集)』·『당의통략』 등이 있는데,『당의통략(黨議通略)』은 파당을 초월하고 문벌을 초월해 공정한 입장에서 당쟁의 원인과 전개과정을 기술한 명저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1. 金澤榮,『숭양기구전(崧陽耆舊傳)』, 1920.
2. 국사편찬위원회,『매천야록(梅泉野錄)』, 탐구당, 1971.
3. 권오돈,「이건창전집해제(李建昌全集解題)」,『이건창전집(李建昌全集)』, 아세아문화사, 1978.
4. “이건창”,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지식백과, 2015.12.2.
5. 곽병찬, “이건창, 참 보수주의자의 통곡”, 한겨레신문, 2015.12.2일자. 29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지역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한국선도의 맥을 이은 일십당 이맥의 괴산 유배지 추적과 활용방안” 등 6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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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1-08-04 03:00:00 기사수정 2011-08-04 09:16:53
■ 소설-드라마 인기 소재로
“윤헌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저 따위 오합지졸이라면 병자년의 수모를 갚는 게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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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신(新) 풍속도--늘어나는 미혼,결혼 꼭해야해?
2011.08.05,
조회 13089
[자유게시글]
진성조
늘어나는 미혼남녀, 결혼 꼭 해야 해?
| 기사입력 2011-07-27 02:42
경제적 문제와 남녀 가치관 변화로 점점 선택이 돼가는 현실결혼 감소, 저출산, 초고령화 진행으로 대한민국 존립 위협최근 각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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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를 심은 사람(L'homme qui plantait des arbes)
2011.08.05,
조회 13151
[자유게시글]
만국활계
나무를 심은 사람(L'homme qui plantait des arbes)
(재생버튼을 누르시면 동영상이 실행됩니다)
제작국 - 캐나다/제작형태 - 극장용 단편/제작년도 - 1987년/시간 - 30분/감독 - 프레데릭 벡(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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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가 '과학화' 되기 시작한 때는?
[1]
2011.08.04,
조회 11266
[자유게시글]
진성조
15세기부터 본격화한 서유럽의 세계진출은 유럽인들이 아시아인 및 아메리카인 들과 접촉하여 교류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만났는데, 기독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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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희망, 인류에 새지평을 여는 대한민국 진리채널
2011.08.04,
조회 12986
[자유게시글]
만국활계
▲ 안면도 꽃지해수욕장의 환상적인 낙조.
조수(鳥獸)가 편안히 누워 쉴 수 있는 곳이라는 의미를 가진 안면도(安眠島).
하지만 안면도 지명에는 더 깊은 진리세계에서 전하는 뜻이 있다.
면적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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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의 재해석
2011.08.03,
조회 11422
[자유게시글]
진성조
한겨레홈 > 뉴스 > 사설.칼럼 > 칼럼
[세상 읽기] 성공의 재해석 / 윤정숙
안철수, 제프 스콜, 권혁일…새로운 자선의 세대가 등장한다그들이 기부문화를 바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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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개의 선택
2011.08.02,
조회 12812
[자유게시글]
만국활계
솔개는 가장 장수하는 조류로 알려져 있다.솔개는 최고 약 70세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는데이렇게 장수하려면 약 40세가 되었을 때매우 고통스럽고 중요한 결심을 해야만 한다.솔개는 약 40세가 되면 발톱이 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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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문제] "호시탐탐 넘봐도 독도=한국땅" 호사카 유지 교수
2011.08.02,
조회 11020
[자유게시글]
만국활계
"호시탐탐 넘봐도 독도=한국땅" 호사카 유지 교수
| 기사입력 2011-04-23 10:03
“이래서 독도는 명백한 한국땅!”2009년 말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주는 학술부문 독도수호상을 받은 세종대 독도종합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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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영박물관 수메르관 보고 충격
2011.08.02,
조회 11876
[자유게시글]
만국활계
한민족 뿌리 캐는 역사작가 변신
10년 만에 소설 ‘수메르’ 펴낸 윤정모 작가“인류 최초의 문명 수메르는 고대 한국인이 주도했다”
▲ photo 김승완 영상미디어 기자
‘반미(反美)작가’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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