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학자이자 논객이었던 신영복의 명복을 빌며
2016.01.16 21: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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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학자이자 논객이었던 신영복의 명복을 빌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
진보적인 경제학자이자 인문학자로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영복(申榮福)은 1941년 8월 23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소귀이다.
부산상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을 받았다. 그 후 숙명여자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강사와 육군사관학교 경제학 교관을 역임하다가 군사독재 시절인 1968년 희대의 간첩단 사건인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20년 이상 옥살이를 했다. 1988년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하고 그 이듬해인 1989년에 사면복권되었다. 1989년 3월에 성공회신학대학 경제학과 강사로 부임해 정치경제학, 사회과학입문, 중국고전강독을 강의했다. 그 후 사회과학부 교수, 교육대학원 원장, 동아시아문화공동체포럼 대표, 민주사회교육원 원장, 대학원 원장, 석좌교수를 차례로 역임했다.
고 신영복(1941-2016)은 밀양군 교육감을 지낸 교사 출신 부친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며 집안 형편이 기울자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1959년 서울대 상대에 입학해 4ㆍ19, 5ㆍ16 등을 연이어 목도했고 61년부터는 독서서클을 만들어 후배들을 지도하는 등 학생운동에 몰두했다. 이때 인연으로 숙명여대 강사 시절 10여 차례 본 선배 김질락, 이진영과의 만남은 후에 통혁당 사건이 터지자 그가 ‘통혁당 핵심 성원’으로 몰리는 단초가 됐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야 구속 시점 이후 구성된 통혁당의 존재를 알았다는 고인은 생전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와의 인터뷰(정년퇴임 기념서 ‘신영복 함께 읽기’)에서 “(중앙정보부가 부풀린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김질락 등이 (성과를 부풀리기 위해) 북에 산하단체라 보고한 것 같다”고 회고했다. 북과의 관련성을 부풀린 양 집단의 저의로 별안간 ‘통혁당 지도간부’가 된 고인은 구타, 전기고문, 수차례의 사형 구형 및 선고 끝에 무기수로 기약 없는 수형생활을 시작했다.
육군 교관으로 장교였던 신영복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구형된 후 충격을 받고 '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마침내, 그 고뇌와 사색은 20년 20일 내내 이어져 완전히 '인간성이 개조'되는 내적 자기혁명을 이루어 낸다. 신영복은 교장의 아들로 성장하여 민중의 삶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남다른 애착은 없었다. 그런데 감옥에서는 밑바닥을 살아온 기층민중과 24시간을 맨살을 부대끼며 살지 않을 수 없었다. 신영복은 같이 감옥살이를 하는 기층 민중을 통해 자신이 지식청년으로서 가지고 있던 창백한 엘리트주의적 관념성과 '먹물성'을 통절히 비판하고 뼈아픈 반성을 하게 된다. 감옥에서의 삶은 서로가 알몸으로 부대끼며 가식 없이 숨김없이 사는 탓에, 한 방에서 오래 살다보니 서로의 과거와 생각을 공유하게 되고 자신의 삶과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번은 목수 출신이 집을 그릴 때 지붕부터 그리지 않고 주춧돌부터 그리는 것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책이나 이론으로 배운 세계가 현실과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생각에 그간의 인식틀을 깨부순 것이다. 무엇보다 10여 년간 교도소에서 노동을 하면서 목공, 영선, 제화공, 재단사 등으로 직접 노동자 생활을 온몸으로 고통을 느끼며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자신의 인간 개조론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특히, 감옥에서의 비전향 장기수들과의 만남은 이후 그의 사상과 인생관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막연하게 책에서나 보아온 분단과 전쟁의 피투성이 현대사의 이야기를 직접 이를 경험한 빨치산들을 통해 생생히 들음으로써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화석'처럼, 살아있는 역사체험을 한다. 또한, 한학자 출신의 사상 장기수로부터 동양고전과 철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서구 사상에 매몰된 현실에 대한 자각과 자존을 깨닫고 고전학습에 몰입한 나머지 이후 성공회대학교에서 동양철학도 강의할 수 있게 된다. 신영복은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이는 감옥에서 한학자 인 정향과 조병호로부터 지도받은 결과라고 하였다. 한문 서체로 익힌 필법은 한글에도 응용해 민중 정서에 맞게 민체, 연대체, 어깨동무체라는 글씨체를 창안해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고인은 자신의 20년 20일의 수형생활을 ‘나의 대학 시절’ ‘사회학 교실’ ‘역사학 교실’, 최종적으로 ‘인간학 교실’이라고 했다. 교도소에서 만난 숱한 동료 재소자들의 삶과 언어가 “계급 성분을 뒤흔들었다”는 것이다. 또 책을 세 권 이상 소유할 수 없도록 한 당시 교도소 규정 탓에 오래 읽을 수 있는 ‘노자 도덕경’등 택한 일은 “서양적 존재론에 매여 있던” 그의 사유를 확장했다. 출소 후 그가 여타 강의와 저서에서 줄곧 “존재론을 넘어서는 관계론”을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현실에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한 ‘창백한’ 관념을 반성”하기 시작한 고인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실린 엽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다. 매월 딱 한 번 필기구가 주어지는 엽서 작성 시간을 각별히 여겼던 그는 한 달 내내 거듭 가다듬은 문장들을 써 내려 어머니, 계수씨 등에게 부쳤다. 지인들은 징역의 비루함 대신 차분한 사유가 담긴 그의 글을 다소 신기하게 여겼다.
고인은 지난해 펴낸 ‘담론’에서 “가족들이 편지의 최종 독자였기 때문에 반듯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최소한의 의무였고, 그 편지가 검열을 거쳤기 때문에 국가권력이 편지를 검열하게 전에 자기검열을 통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자존심”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숱한 재소자가 자살을 택했지만 “신문지 크기만 한 햇볕을 무릎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이 좋아 자살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적기도 했다.
수인으로서의 고뇌가 응축된 이 육필 엽서를 나눠 갖던 지인 중 일부가 ‘평화신문’을 통해 이를 소개하며 존재가 알려진 엽서 속 글들은 독자들의 열렬한 요청 속에 출판 작업이 진행됐고, 그가 출소하던 1988년 여름 함께 세상에 나왔다. 1993년에는 육필 엽서 원본을 묶은 영인본 ‘엽서’가 출간된 이 사색들은 뭉클한 감동을 남기며 시대의 고전으로 찬사 받았다. 출소 이듬해 성공회대 강단에 선 그는 경제학 강의뿐 아니라 ‘사상사’강의를 자처했고 20여 년간 벼린 동양고전에 대한 이해를 풀어냈다. 동서고금의 지식, 겸손하되 날카로운 사색을 담은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강의’ 등의 저서는 출간될 때 마다 압도적 호응 속에 ‘신영복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글을 읽는 것은 따뜻하되 날카로운 통찰에 탄복하는 과정인 동시에, 오지 않은 미래를 절감하는 노동이었기에 독자들이 애틋한 심정으로 그의 글을 고전의 반열에 올린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자신이 만난 사람 모두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인간적으로 대하는 지식인을 이제까지 보지 못했다”는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고인의 정년퇴임을 앞두고 쓴 글에서 “선생의 사상을 일관하는 저류는 인간해방”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선생의 사상을 받치는 두 지반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과 관계론의 인간 철학”이라며 “마르크스의 경직성을 넘어서며 동시에 과학적 분석을 강조하는 점에서 우리 진보주의의 새로운 지평”이라고 썼다.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신영복체’ ‘어깨동무체’ 등 선이 굵고 단정한 글씨체를 선보이며 서예가로도 활약한 고인의 ‘처음처럼’은 소주 브랜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서화 에세이 ‘처음처럼’의 개정판 출간을 준비 중인 돌베개 출판사의 이경아 편집주간은 “최근까지도 개정판 원고를 하나하나 손수 들여다보던 선생의 갑작스러운 소식에 황망할 따름”이라며 “지난해 ‘담론’ 서문에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쓰셨기에 마음이 아팠는데 돌이켜보면 이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신 게 아닌가 싶다”며 안타까워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생의 전체에 고스란히 새긴 고인은 마지막 강연에서까지 원망, 비관, 비난 대신 낙관과 희망을 말해 좌중을 숙연하게 했다.
“사람을 거름하기는커녕 도리어 ‘사람으로’ 거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절망과 역경을 ‘사람’을 키워 내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이 석과불식(碩果不食ㆍ씨과일은 먹지 않고 땅에 심는다)의 교훈입니다. 욕망과 소유의 거품, 성장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고 우리의 삶을 그 근본에서 지탱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 뼈대를 튼튼히 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이고 희망의 언어입니다.”
특히 좋아한 글귀는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이다. 마지막 강연의 말미에서 그는 말했다 “우리가 흘려보낸 수많은 언약들이 언젠가는 여러분의 삶의 길목에서 꽃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냉전으로 인한 남북 분단의 고통을 생 전체에 새긴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9),『나무야 나무야』(돌베개, 1996),『더불어 숲 1?2』(2003),『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2004), 서화 에세이『처음처럼』(랜덤하우스코리아, 2007),『중국 역대 시가선집』(2008),『청구회 추억』(돌베개, 2008),『느티아래강의실』(한울, 2009),『신영복-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변방을 찾아서』(2012),『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돌베게, 2015) 등 많은 스테디셀러를 통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기 성찰, 냉철한 사회 현실 분석과 세계인식에 관한 깊은 사유로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던져줌으로써 한국 사상사의 원류로 자리매김했다. 2008년 제3회 임창순상과 2015년 제19회 만해문예 대상을 수상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희귀병인 피부암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2016년 1월 15일 오후 10시10분쯤 서울 목동 자택에서 향년 75세로 별세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영순씨(68)와 아들 지용씨(26)가 있다.
<참고문헌>
1. “신영복”, 위키백과, 2016.1.16일자.
2. 김혜영, “냉전의 모진 비극 겪어낸 한국의 지성 잠들다 :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타계”, 한국일보, 2016.1.16일자. 13면.
3. 심진용, “인간과 시대의 아픔 아우른 인문학의 큰별 지다”, 경향신문, 2016.1.16일자. 2면.
4. 김환영, “국운 기르는 건 사람...때가 아니다”, 중앙일보, 2016.1.16일자. 22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지역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한국선도의 맥을 이은 일십당 이맥의 괴산 유배지 추적과 활용방안” 등 6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진보적인 경제학자이자 인문학자로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영복(申榮福)은 1941년 8월 23일 경상남도 밀양에서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소귀이다.
부산상고와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학위을 받았다. 그 후 숙명여자대학교 정경대학 경제학과 강사와 육군사관학교 경제학 교관을 역임하다가 군사독재 시절인 1968년 희대의 간첩단 사건인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20년 이상 옥살이를 했다. 1988년에 특별가석방으로 출소하고 그 이듬해인 1989년에 사면복권되었다. 1989년 3월에 성공회신학대학 경제학과 강사로 부임해 정치경제학, 사회과학입문, 중국고전강독을 강의했다. 그 후 사회과학부 교수, 교육대학원 원장, 동아시아문화공동체포럼 대표, 민주사회교육원 원장, 대학원 원장, 석좌교수를 차례로 역임했다.
고 신영복(1941-2016)은 밀양군 교육감을 지낸 교사 출신 부친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며 집안 형편이 기울자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1959년 서울대 상대에 입학해 4ㆍ19, 5ㆍ16 등을 연이어 목도했고 61년부터는 독서서클을 만들어 후배들을 지도하는 등 학생운동에 몰두했다. 이때 인연으로 숙명여대 강사 시절 10여 차례 본 선배 김질락, 이진영과의 만남은 후에 통혁당 사건이 터지자 그가 ‘통혁당 핵심 성원’으로 몰리는 단초가 됐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야 구속 시점 이후 구성된 통혁당의 존재를 알았다는 고인은 생전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와의 인터뷰(정년퇴임 기념서 ‘신영복 함께 읽기’)에서 “(중앙정보부가 부풀린 측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김질락 등이 (성과를 부풀리기 위해) 북에 산하단체라 보고한 것 같다”고 회고했다. 북과의 관련성을 부풀린 양 집단의 저의로 별안간 ‘통혁당 지도간부’가 된 고인은 구타, 전기고문, 수차례의 사형 구형 및 선고 끝에 무기수로 기약 없는 수형생활을 시작했다.
육군 교관으로 장교였던 신영복은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구형된 후 충격을 받고 '아,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마침내, 그 고뇌와 사색은 20년 20일 내내 이어져 완전히 '인간성이 개조'되는 내적 자기혁명을 이루어 낸다. 신영복은 교장의 아들로 성장하여 민중의 삶에 대한 철저한 이해와 남다른 애착은 없었다. 그런데 감옥에서는 밑바닥을 살아온 기층민중과 24시간을 맨살을 부대끼며 살지 않을 수 없었다. 신영복은 같이 감옥살이를 하는 기층 민중을 통해 자신이 지식청년으로서 가지고 있던 창백한 엘리트주의적 관념성과 '먹물성'을 통절히 비판하고 뼈아픈 반성을 하게 된다. 감옥에서의 삶은 서로가 알몸으로 부대끼며 가식 없이 숨김없이 사는 탓에, 한 방에서 오래 살다보니 서로의 과거와 생각을 공유하게 되고 자신의 삶과 완전히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번은 목수 출신이 집을 그릴 때 지붕부터 그리지 않고 주춧돌부터 그리는 것을 보고 그는 큰 충격을 받는다. 책이나 이론으로 배운 세계가 현실과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생각에 그간의 인식틀을 깨부순 것이다. 무엇보다 10여 년간 교도소에서 노동을 하면서 목공, 영선, 제화공, 재단사 등으로 직접 노동자 생활을 온몸으로 고통을 느끼며 경험했다는 사실은 그 자신의 인간 개조론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특히, 감옥에서의 비전향 장기수들과의 만남은 이후 그의 사상과 인생관을 결정짓는 계기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막연하게 책에서나 보아온 분단과 전쟁의 피투성이 현대사의 이야기를 직접 이를 경험한 빨치산들을 통해 생생히 들음으로써 '피가 통하고 숨결이 이는 화석'처럼, 살아있는 역사체험을 한다. 또한, 한학자 출신의 사상 장기수로부터 동양고전과 철학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 서구 사상에 매몰된 현실에 대한 자각과 자존을 깨닫고 고전학습에 몰입한 나머지 이후 성공회대학교에서 동양철학도 강의할 수 있게 된다. 신영복은 서예가로도 명성이 높았다. 이는 감옥에서 한학자 인 정향과 조병호로부터 지도받은 결과라고 하였다. 한문 서체로 익힌 필법은 한글에도 응용해 민중 정서에 맞게 민체, 연대체, 어깨동무체라는 글씨체를 창안해 독특한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리하여 고인은 자신의 20년 20일의 수형생활을 ‘나의 대학 시절’ ‘사회학 교실’ ‘역사학 교실’, 최종적으로 ‘인간학 교실’이라고 했다. 교도소에서 만난 숱한 동료 재소자들의 삶과 언어가 “계급 성분을 뒤흔들었다”는 것이다. 또 책을 세 권 이상 소유할 수 없도록 한 당시 교도소 규정 탓에 오래 읽을 수 있는 ‘노자 도덕경’등 택한 일은 “서양적 존재론에 매여 있던” 그의 사유를 확장했다. 출소 후 그가 여타 강의와 저서에서 줄곧 “존재론을 넘어서는 관계론”을 강조한 것은 이 때문이다.
“현실에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한 ‘창백한’ 관념을 반성”하기 시작한 고인이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실린 엽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이 시기다. 매월 딱 한 번 필기구가 주어지는 엽서 작성 시간을 각별히 여겼던 그는 한 달 내내 거듭 가다듬은 문장들을 써 내려 어머니, 계수씨 등에게 부쳤다. 지인들은 징역의 비루함 대신 차분한 사유가 담긴 그의 글을 다소 신기하게 여겼다.
고인은 지난해 펴낸 ‘담론’에서 “가족들이 편지의 최종 독자였기 때문에 반듯하게 살아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최소한의 의무였고, 그 편지가 검열을 거쳤기 때문에 국가권력이 편지를 검열하게 전에 자기검열을 통해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는 자존심”이었다고 고백했다. 그는 숱한 재소자가 자살을 택했지만 “신문지 크기만 한 햇볕을 무릎에 받고 있을 때의 따스함이 좋아 자살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고 적기도 했다.
수인으로서의 고뇌가 응축된 이 육필 엽서를 나눠 갖던 지인 중 일부가 ‘평화신문’을 통해 이를 소개하며 존재가 알려진 엽서 속 글들은 독자들의 열렬한 요청 속에 출판 작업이 진행됐고, 그가 출소하던 1988년 여름 함께 세상에 나왔다. 1993년에는 육필 엽서 원본을 묶은 영인본 ‘엽서’가 출간된 이 사색들은 뭉클한 감동을 남기며 시대의 고전으로 찬사 받았다. 출소 이듬해 성공회대 강단에 선 그는 경제학 강의뿐 아니라 ‘사상사’강의를 자처했고 20여 년간 벼린 동양고전에 대한 이해를 풀어냈다. 동서고금의 지식, 겸손하되 날카로운 사색을 담은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강의’ 등의 저서는 출간될 때 마다 압도적 호응 속에 ‘신영복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글을 읽는 것은 따뜻하되 날카로운 통찰에 탄복하는 과정인 동시에, 오지 않은 미래를 절감하는 노동이었기에 독자들이 애틋한 심정으로 그의 글을 고전의 반열에 올린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자신이 만난 사람 모두에게 이렇게 따뜻하게 인간적으로 대하는 지식인을 이제까지 보지 못했다”는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고인의 정년퇴임을 앞두고 쓴 글에서 “선생의 사상을 일관하는 저류는 인간해방”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선생의 사상을 받치는 두 지반은 마르크스 정치경제학과 관계론의 인간 철학”이라며 “마르크스의 경직성을 넘어서며 동시에 과학적 분석을 강조하는 점에서 우리 진보주의의 새로운 지평”이라고 썼다.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신영복체’ ‘어깨동무체’ 등 선이 굵고 단정한 글씨체를 선보이며 서예가로도 활약한 고인의 ‘처음처럼’은 소주 브랜드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서화 에세이 ‘처음처럼’의 개정판 출간을 준비 중인 돌베개 출판사의 이경아 편집주간은 “최근까지도 개정판 원고를 하나하나 손수 들여다보던 선생의 갑작스러운 소식에 황망할 따름”이라며 “지난해 ‘담론’ 서문에 ‘모든 텍스트는 언제나 다시 읽히는 것이 옳다. 필자는 죽고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하는 것’이라고 쓰셨기에 마음이 아팠는데 돌이켜보면 이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하신 게 아닌가 싶다”며 안타까워했다.
한국 근현대사의 비극을 생의 전체에 고스란히 새긴 고인은 마지막 강연에서까지 원망, 비관, 비난 대신 낙관과 희망을 말해 좌중을 숙연하게 했다.
“사람을 거름하기는커녕 도리어 ‘사람으로’ 거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절망과 역경을 ‘사람’을 키워 내는 것으로 극복하는 것, 이것이 석과불식(碩果不食ㆍ씨과일은 먹지 않고 땅에 심는다)의 교훈입니다. 욕망과 소유의 거품, 성장에 대한 환상을 청산하고 우리의 삶을 그 근본에서 지탱하는 정치, 경제, 문화의 뼈대를 튼튼히 하고, 사람을 키우는 일 이것이 석과불식의 교훈이고 희망의 언어입니다.”
특히 좋아한 글귀는 “언약은 강물처럼 흐르고 만남은 꽃처럼 피어나리”이다. 마지막 강연의 말미에서 그는 말했다 “우리가 흘려보낸 수많은 언약들이 언젠가는 여러분의 삶의 길목에서 꽃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냉전으로 인한 남북 분단의 고통을 생 전체에 새긴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감옥으로부터의 사색』(1989),『나무야 나무야』(돌베개, 1996),『더불어 숲 1?2』(2003),『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2004), 서화 에세이『처음처럼』(랜덤하우스코리아, 2007),『중국 역대 시가선집』(2008),『청구회 추억』(돌베개, 2008),『느티아래강의실』(한울, 2009),『신영복-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변방을 찾아서』(2012),『담론-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돌베게, 2015) 등 많은 스테디셀러를 통해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자기 성찰, 냉철한 사회 현실 분석과 세계인식에 관한 깊은 사유로 우리 사회에 큰 울림을 던져줌으로써 한국 사상사의 원류로 자리매김했다. 2008년 제3회 임창순상과 2015년 제19회 만해문예 대상을 수상했다.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는 희귀병인 피부암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2016년 1월 15일 오후 10시10분쯤 서울 목동 자택에서 향년 75세로 별세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유영순씨(68)와 아들 지용씨(26)가 있다.
<참고문헌>
1. “신영복”, 위키백과, 2016.1.16일자.
2. 김혜영, “냉전의 모진 비극 겪어낸 한국의 지성 잠들다 :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 타계”, 한국일보, 2016.1.16일자. 13면.
3. 심진용, “인간과 시대의 아픔 아우른 인문학의 큰별 지다”, 경향신문, 2016.1.16일자. 2면.
4. 김환영, “국운 기르는 건 사람...때가 아니다”, 중앙일보, 2016.1.16일자. 22면.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1994),『아우내 단오축제』(1998),『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지역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한국선도의 맥을 이은 일십당 이맥의 괴산 유배지 추적과 활용방안” 등 6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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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다음날 우리집서 만든 신문 '건국시보'광복의 기쁨 함께 나눴다
2024.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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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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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정신 부정하는 신 친일파 뉴라이트의 역사 쿠대타 성공 못해
2024.08.30,
조회 9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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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정신 부정하는 新 친일파…역사 쿠데타 성공 못해”[이준식 전 독립기념관장, 뉴라이트를 말하다]2024. 08. 28 by 이준섭 기자뒤틀린 ‘친일 역사관’ 주입 위해尹정부 발판 삼아 곳곳 요직 꿰차“뉴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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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의 후손 고려인 돕기 운동
2024.08.29,
조회 95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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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같은 민족고려인 입니다.독립운동가의 후손 고려인빈곤과 무국적의 굴레를끊을 수 있도록여러분이 함께해 주세요고려인 후원하기독립운동가 이종국의 후손故 시인 이 스타니슬라브독립운동가의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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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국적 고려인 시인 이스타니슬라브의 절규와 현실
2024.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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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부방]
신상구
무국적 고려인의 힘든 삶: 조국을 그리는 시인 이스타니슬라브의 절규와 현실 ramen_suika ・ 2024. 7. 17. 10:05URL 복사 이웃추가 본문 기타 기능<조국아 울지마라> 독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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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지위 강화는 일본 내 식민지 갖는 효과
202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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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지위 강화는 일본 내 식민지 갖는 효과 한일수교 앞둔 60년 전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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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 고종 시대 충청도 가야금 명창을 창시한 '박팔괘'를 아시나요.
2024.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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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공부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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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 고종 시대 충청도 가야금 명창을 창시한 '박팔괘'를 아시나요.이전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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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학박사 신상구가 최근 발간한 단행본 2권 홍보자료 대한출판문화협회 등록
202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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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장 1곳당 연 5600명, 죽을 때도 경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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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월 '피벗 선언' 했는데, 대한민국 빚 3000조 돌파
2024.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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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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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의 ‘청포도 고장’ 안동이냐 포항이냐 글자 크기 변경출력하기
202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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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역사 교과서, 역사논쟁 판 커지나
202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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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2024.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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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8·15 통일 독트린' 핵심 내용과 북 호응·추진 동력 과제
2024.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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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 '8·15 통일 독트린' 핵심 내용과 북 호응·추진 동력 과제 '8.15 통일 독트린' 발표하는 윤석열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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