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류인식 선생의 생애와 업적
2016.03.21 02: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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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류인식 선생의 생애와 업적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辛相龜
류인식(柳寅植, 1865-1928)은 고종 2년이 1865년 5월 3일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삼산마을에서 류필영(柳必永)과 청주 정씨(淸州 鄭氏) 사이에서 2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래(聖來), 호는 동산(東山)이다. 후에 큰집 9촌 아저씨 기영(祈永)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부인 류필영은 퇴계 학통을 이어받은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하로 1881년의 영남만인소에 참가하였고, 1919년에는 유림들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에도 참여하는 등 철저한 위정척사사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따라서 협동학교를 설립하는 등 개화계몽운동을 펼치려는 아들 동산과의 관계는 좋을 리 없었다. 부자간 불화의 결정적 계기는 동산이 개화사상가로 전회하여 서울에서 단발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일이었다.
동산은 태어나면서부터 영민하고 재주가 뛰어났는데 6~7세경부터 할아버지 용재공(容齋公, 성진을 말함)에게서 한학을 배우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리고 김도화(金道和, 1825-1912)의 문하에서 전통적인 영남유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그런데 류인식은 혁신유림으로서 혁구유신(革舊維新)을 추구하는 바람에 스승 김도화로부터 사제관계를 끊기는 파문을 당하여 슬퍼하고 괴로워했다.
28세 되던 1893년 과거를 보러 상경하였으나 조선조의 마지막 시험이었던 이 과거에서 제도의 문란과 조정의 부패를 목격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귀향하였다. 귀향 후 학문에 전념하던 류인식은 곧 외세의 침략을 감지하고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가하였다.
류인식의 독립운동은 1895년 말 의병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의병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국내의 산수를 돌아보며 10년 동안 민족의 길을 찾는 데 몰입하였다. 그러다가 1903년 성균관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이 때 류인식은 신채호(申采浩)·장지연(張志淵) 등과 교류하며 서구의 근대사상과 학문에 심취하게 되었다. 특히 신채호와의 만남은 류인식의 사상과 행동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전기가 되었다.
1904년부터 류인식은 본격적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신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고향인 안동에 근대식 학교 설립을 시도하였다. 이에 따라 1907년 봄 임하 내앞(川前)에 근대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고 교감에 취임하였다. 협동학교는 1908년부터 1918년까지 모두 80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졸업생들은 대부분 만주로 망명하거나 고향에서 전개된 3?1운동이나 신간회 지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협동학교 설립 이후 류인식의 계몽운동 행보는 계속되었다. 1907년 11월에는 대한협회 조직에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으며,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신민회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참여하여 교육구국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협동학교의 업무를 류동태에게 위임하고, 이상룡(李相龍)·김동삼 등과 함께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서간도 봉천성 유하현에 정착한 류인식은 경학사(耕學社) 조직에 참여하고, 교육부장을 맡아 독립운동 기지 건설 및 이주 한인들의 생활 안정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흉작이 거듭되어 경학사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자, 류인식은 1912년 7월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잠시 귀국하였다가 일제에 체포되었다. 석방 후 류인식은 망명을 포기하고 국내에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1910년대 류인식의 국내 활동은 교육운동과 역사서 서술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대별된다. 류인식은 1917년 다시 협동학교를 맡으면서 망명으로 못다 한 그의 교육 이념을 실천에 옮겼다. 또한 귀국 후『대동사(大東史)』의 저술에 심혈을 기울였다.『대동사』는 단군에서 시작하여 경술국치까지 4243년간의 우리나라 역사를 편년체 형식으로 서술한 총 21권 11책의 통사이다. 이 저서는 교육이 철저히 억압당하고 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귀중한 작업이었으며, 그 자체가 바로 적극적인 항일운동이었던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런데 임나일본부를 역사적 사실로 서술한 것은 무비판적으로 식민사학의 굴레에 빠진 한말 사학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한 큰 결점이다.
류인식의 교육운동은 1920년에도 계속되었다. 1920년 이상재(李商在)·류진태(柳鎭泰) 등과 함께 전국 교육기관을 통일하여 조선교육회를 창립하였다. 1923년 3월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 발기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선전부장으로서 경상도를 순회하며 강연을 통해 지방의 청년·지식인들을 고무시켰다. 교육운동을 전개하던 류인식은 1920년대 들어와 대중을 지도하는 사회운동에 눈을 돌렸다. 1920년 류인식은 박중화(朴重華)와 함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설립에 참가,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는데 이는 3·1운동을 통해 그가 대중을 인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독립운동계에 좌우합작운동의 결과인 신간회가 탄생하자 8월에 안동지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활동하며, 안동 지역의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이와 같이 협동학교에서 출발하여 계몽운동가, 역사 서술가, 사회운동가를 넘나들며 줄기차게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류인식은 1928년 4월 29일 생을 마감하였다. 신간회 안동지회를 비롯한 안동의 청년운동단체들은 류인식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려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졌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류인식의 저서로는『대동사(大東史)』,『대동시사(大東詩史)』,『동산전서(東山全書)』, 『동산문고(東山文稿)』가 있다.
<참고문헌>
1. 류인식,『동산문고』,동산선생기념사업회, 1978.
2. 김희곤, 「동산 유인식의 생애와 독립운동」,『민족 위해 살다간 안동의 근대인물』, 안동청년유도회, 2003.
3. “류인식(柳寅植)”, 네이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3.20.
4. “류인식(柳寅植)”, 네이버캐스트, 2016.3.20.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6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류인식(柳寅植, 1865-1928)은 고종 2년이 1865년 5월 3일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삼산마을에서 류필영(柳必永)과 청주 정씨(淸州 鄭氏) 사이에서 2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래(聖來), 호는 동산(東山)이다. 후에 큰집 9촌 아저씨 기영(祈永)의 아들로 입양되었다.
부인 류필영은 퇴계 학통을 이어받은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문하로 1881년의 영남만인소에 참가하였고, 1919년에는 유림들의 독립운동인 ‘파리장서’에도 참여하는 등 철저한 위정척사사상을 지닌 인물이었다. 따라서 협동학교를 설립하는 등 개화계몽운동을 펼치려는 아들 동산과의 관계는 좋을 리 없었다. 부자간 불화의 결정적 계기는 동산이 개화사상가로 전회하여 서울에서 단발을 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일이었다.
동산은 태어나면서부터 영민하고 재주가 뛰어났는데 6~7세경부터 할아버지 용재공(容齋公, 성진을 말함)에게서 한학을 배우면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리고 김도화(金道和, 1825-1912)의 문하에서 전통적인 영남유학을 배우며 성장하였다. 그런데 류인식은 혁신유림으로서 혁구유신(革舊維新)을 추구하는 바람에 스승 김도화로부터 사제관계를 끊기는 파문을 당하여 슬퍼하고 괴로워했다.
28세 되던 1893년 과거를 보러 상경하였으나 조선조의 마지막 시험이었던 이 과거에서 제도의 문란과 조정의 부패를 목격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귀향하였다. 귀향 후 학문에 전념하던 류인식은 곧 외세의 침략을 감지하고 독립운동의 대열에 참가하였다.
류인식의 독립운동은 1895년 말 의병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의병이 실패로 끝나자 그는 국내의 산수를 돌아보며 10년 동안 민족의 길을 찾는 데 몰입하였다. 그러다가 1903년 성균관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이 때 류인식은 신채호(申采浩)·장지연(張志淵) 등과 교류하며 서구의 근대사상과 학문에 심취하게 되었다. 특히 신채호와의 만남은 류인식의 사상과 행동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전기가 되었다.
1904년부터 류인식은 본격적으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신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고향인 안동에 근대식 학교 설립을 시도하였다. 이에 따라 1907년 봄 임하 내앞(川前)에 근대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하고 교감에 취임하였다. 협동학교는 1908년부터 1918년까지 모두 80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졸업생들은 대부분 만주로 망명하거나 고향에서 전개된 3?1운동이나 신간회 지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협동학교 설립 이후 류인식의 계몽운동 행보는 계속되었다. 1907년 11월에는 대한협회 조직에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으며, 안창호(安昌浩)·양기탁(梁起鐸)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신민회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참여하여 교육구국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해외에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협동학교의 업무를 류동태에게 위임하고, 이상룡(李相龍)·김동삼 등과 함께 만주 망명길에 올랐다. 서간도 봉천성 유하현에 정착한 류인식은 경학사(耕學社) 조직에 참여하고, 교육부장을 맡아 독립운동 기지 건설 및 이주 한인들의 생활 안정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흉작이 거듭되어 경학사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자, 류인식은 1912년 7월 독립운동 자금을 모으기 위해 잠시 귀국하였다가 일제에 체포되었다. 석방 후 류인식은 망명을 포기하고 국내에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1910년대 류인식의 국내 활동은 교육운동과 역사서 서술이라는 두 가지 측면으로 대별된다. 류인식은 1917년 다시 협동학교를 맡으면서 망명으로 못다 한 그의 교육 이념을 실천에 옮겼다. 또한 귀국 후『대동사(大東史)』의 저술에 심혈을 기울였다.『대동사』는 단군에서 시작하여 경술국치까지 4243년간의 우리나라 역사를 편년체 형식으로 서술한 총 21권 11책의 통사이다. 이 저서는 교육이 철저히 억압당하고 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매우 귀중한 작업이었으며, 그 자체가 바로 적극적인 항일운동이었던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런데 임나일본부를 역사적 사실로 서술한 것은 무비판적으로 식민사학의 굴레에 빠진 한말 사학의 오류를 그대로 답습한 큰 결점이다.
류인식의 교육운동은 1920년에도 계속되었다. 1920년 이상재(李商在)·류진태(柳鎭泰) 등과 함께 전국 교육기관을 통일하여 조선교육회를 창립하였다. 1923년 3월에는 조선민립대학기성회(朝鮮民立大學期成會) 발기총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선전부장으로서 경상도를 순회하며 강연을 통해 지방의 청년·지식인들을 고무시켰다. 교육운동을 전개하던 류인식은 1920년대 들어와 대중을 지도하는 사회운동에 눈을 돌렸다. 1920년 류인식은 박중화(朴重華)와 함께 조선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 설립에 참가,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는데 이는 3·1운동을 통해 그가 대중을 인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독립운동계에 좌우합작운동의 결과인 신간회가 탄생하자 8월에 안동지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활동하며, 안동 지역의 사회운동을 이끌었다. 이와 같이 협동학교에서 출발하여 계몽운동가, 역사 서술가, 사회운동가를 넘나들며 줄기차게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류인식은 1928년 4월 29일 생을 마감하였다. 신간회 안동지회를 비롯한 안동의 청년운동단체들은 류인식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치르려 하였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묘소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갑동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졌다.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류인식의 저서로는『대동사(大東史)』,『대동시사(大東詩史)』,『동산전서(東山全書)』, 『동산문고(東山文稿)』가 있다.
<참고문헌>
1. 류인식,『동산문고』,동산선생기념사업회, 1978.
2. 김희곤, 「동산 유인식의 생애와 독립운동」,『민족 위해 살다간 안동의 근대인물』, 안동청년유도회, 2003.
3. “류인식(柳寅植)”, 네이버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2016.3.20.
4. “류인식(柳寅植)”, 네이버캐스트, 2016.3.20.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1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한국 노벨문학상 수상조건 심층탐구” 등 65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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