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에서 규모 6 지진 실제로 당해보니
2019.04.25 13:19 |
조회 11405
[두바이 파일럿 도전기-103] 지금까지 생각해보면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크게 사고를 당한 적도 없고, 홍수 화재 사고 등 대형 재해에도 안전했다. 뉴스에 가끔 관련 소식이 나오면 불쌍하긴 한데 그건 어디까지나 남의 일이었고, 때로 총기 난사 사건이 뉴스에 뜨면 영화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맞는다. 최근 나는 죽음의 공포를 제대로 느꼈다.

1. 재난 영화의 도입부와 같았던
모든 게 평소 때와 같았다. 전날 비행 스케줄을 체크하고 정해진 수순에 따라 비행훈련을 받기 위해 비행 예정 시간보다 일찍 공항 격납고에 도착했다. 격납고는 비행기를 평소 때 보관하는 창고로 엄청나게 큰 돔 형태의 저장 공간이다. 도착해서 이것저것 서류를 작성하고, 비행기에 이상은 있는지 없는지 미리 검사를 하면서 손을 보고, 그날 비행에서는 무엇을 배우는지 친구들과 함께 의논을 했다.
오후 4시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날의 비행은 밤비행이었기 때문에 일몰 뒤인 저녁 6시 이후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당시 공항 격납고에는 나의 비행을 가르쳐줄 교관과 내 비행기 뒷자리에 앉아 참관할 인도인 동기 오스마 그리고 나 이렇게 5명 내외가 대기하고 있었다. 다들 머릿속에 '빨리 하고 빨리 가서 쉬어야 하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기 오스마가 말했다. "헤이, 커피나 마시자." 나는 당연히 좋다고 말하고, 우리 둘은 커피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는 교관 대기방으로 가서 그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커피 마셔도 되느냐고 묻고 바로 커피를 내렸다. 나는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블랙커피가 좋다. 하지만 오스마는 이것저것 설탕도 넣고 크림도 넣고 하여튼 그렇게 휘휘 저으면서 커피향을 맡았다.
그 방에는 나와 내 동기 그리고 내 비행을 지도할 교관 이렇게 3명이 있었다. 방이랑 연결된 격납고 안에는 항공정비사들이 여느 때와 같이 비행기를 손보고 있었다. 길고양이 몇 마리가 격납고 안에서 잠을 자고 있고, 구수한 헤이즐넛 향기가 방안을 감돌았다. 평화로운 오후의 나날 그 자체였다. 브루노 마스의 달달한 사랑 노래가 어울리는 날이었다.


2. 소리 없이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
그때였다. 커피잔이 흔들린 것이.
'어 이게 뭐지?'
동기 녀석과 같이 계속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불과 1~2초 남짓한 순간이었지만 그때까지도 이것이 무슨 현상이었는지 몰랐다. 그러고 1초 정도 더 지났을까. 땅이 양옆으로 흔들렸다. 롯데월드에 가면 심하게 흔들리는 파도타기 놀이기구가 있지 않나. 놀이기구 자체가 뱅글뱅글 돌면서 바닥도 막 흔들리는 그거. 굳이 비교를 하자면 그런 느낌이랄까. 공짜로 이런 경험을 하게 되다니. 커피는 당연히 쏟아졌다.
동시에 외쳤다. 나는 한국어로, 오스마와 교관은 영어로.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그 느낌 그대로를 살리는 그 대사로.
"씨×!!!!" "F×ck!!!!"
경박하게 보였다면 미안하다. "하하, 이걸 어쩌지. 지금 지진이 일어난 거 같은데 어디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모색해볼까?" 예전에 '타이타닉' 영화를 볼 때 타이타닉이 침몰할 때 끝까지 관현악 3중주를 연주했다는 악사들처럼 멋있게 보이고 싶었으나 깨달은 것은 난 결국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것.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후에 기회가 있다면(?) 성공하길 바란다.


하여튼 인생에서 가장 긴 10초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동안 뇌 기능도 정지되었다. 평소 먹을 것 앞에서나 수업 종료 1분 전에만 빠르게 돌아가는 내 뇌이건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은 건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지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생각했던 나의 모습이란…. 하, 그래도 어디서 배운 건 있었는지 바로 테이블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이제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천장이 무너지면 난 죽는다.'
다행히 결과적으로 천장은 무너지지 않았고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동기와 나 그리고 교관은 지진이 일어난 뒤 7~8초 정도쯤이었나 조금 잦아든 틈을 이용해 재빠르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격납고 특성상 만약 이 커다란 돔 천장이 내려앉으면 요단강행 익스프레스였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오니 새들이 낮게 떼를 지어 날고 있었고, 가로등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유리창이 와장창 깨졌으며 나는 왜 커피잔을 계속 들고 있었는지 나오고 나서야 알게 됐다.


3. 그 후 달라진 것들
지진이 일어나자 온 도시가 정전이 됐다. 도시 전체가 암흑으로 가득 차고 자체발전기가 있는 몇몇 가게를 제외하고는 전부 문을 닫아야만 했다. 아니 문을 닫지 않더라도 모든 식기나 전시제품이 쏟아져서 제대로 영업하는 곳이 없었다. 그리고 곧 다시 찾아올 여진에 대해 불안해하면서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날 밤 3번의 여진이 더 있었다. 다행히 심하지는 않았다.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하루가 그렇게 흘러갔다.
그 후 뉴스에서는 루손섬 구타드에서 북북동 방향으로 1㎞ 떨어진 지점에서 규모 6.1의 강진이 발생했다고 소식을 전했다. 지진 피해가 가장 심한 팜팡가주에서 14명이 숨진 것을 비롯해 최소 16명이 숨지고 80여 명이 부상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이 바로 팜팡가주다. 우리 지역 근처에서는 슈퍼마켓이 있는 4층짜리 건물이 무너지면서 20~30명가량이 죽거나 다쳤다. 나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군생활을 의무소방으로 다녀왔기에 각종 사고 현장 그리고 죽음을 참 수 없이도 겪었는데,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어떨 땐 눈물도 흘렸지만 모두 남의 일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지진을 처음 겪었다. 그것도 규모 5~6의 지진을. 예전 "나한테 당해봐야만 아나"라고 일갈했던 모 전 대통령이 생각난다. 그땐 공감능력 없다고 비웃었는데 나도 이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네 당신이 맞습니다. 당해봐야지 알더라고요.
나는 특별하지 않다. 죽음은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 인생무상이다. 욕심 부리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전부 다 이런 거 의미 없다. 살아 있을 때 서로 아끼자. 떠날 때 후회 없도록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소 내 마음을 잘 전하자. 겸허해지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자. 내가 이번 지진으로 배운 것들이다. 감사합니다.
[Flying J / john.won320@gmail.com]

▲ 필리핀 클락공항 격납고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고양이. 평소처럼 평화로운 오후였다.
모든 게 평소 때와 같았다. 전날 비행 스케줄을 체크하고 정해진 수순에 따라 비행훈련을 받기 위해 비행 예정 시간보다 일찍 공항 격납고에 도착했다. 격납고는 비행기를 평소 때 보관하는 창고로 엄청나게 큰 돔 형태의 저장 공간이다. 도착해서 이것저것 서류를 작성하고, 비행기에 이상은 있는지 없는지 미리 검사를 하면서 손을 보고, 그날 비행에서는 무엇을 배우는지 친구들과 함께 의논을 했다.
오후 4시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날의 비행은 밤비행이었기 때문에 일몰 뒤인 저녁 6시 이후에 진행될 예정이었다. 당시 공항 격납고에는 나의 비행을 가르쳐줄 교관과 내 비행기 뒷자리에 앉아 참관할 인도인 동기 오스마 그리고 나 이렇게 5명 내외가 대기하고 있었다. 다들 머릿속에 '빨리 하고 빨리 가서 쉬어야 하지'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동기 오스마가 말했다. "헤이, 커피나 마시자." 나는 당연히 좋다고 말하고, 우리 둘은 커피 에스프레소 머신이 있는 교관 대기방으로 가서 그들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커피 마셔도 되느냐고 묻고 바로 커피를 내렸다. 나는 아무것도 첨가하지 않은 블랙커피가 좋다. 하지만 오스마는 이것저것 설탕도 넣고 크림도 넣고 하여튼 그렇게 휘휘 저으면서 커피향을 맡았다.
그 방에는 나와 내 동기 그리고 내 비행을 지도할 교관 이렇게 3명이 있었다. 방이랑 연결된 격납고 안에는 항공정비사들이 여느 때와 같이 비행기를 손보고 있었다. 길고양이 몇 마리가 격납고 안에서 잠을 자고 있고, 구수한 헤이즐넛 향기가 방안을 감돌았다. 평화로운 오후의 나날 그 자체였다. 브루노 마스의 달달한 사랑 노래가 어울리는 날이었다.

▲ 필자가 지진당시 머물고 있었던 필리핀 클락공항. 지진후 승객 터미널 내부가 크게 파손됐다.

▲ 필자가 지진당시 머물고 있었던 필리핀 클락공항. 지진후 승객 터미널 내부가 크게 파손됐다.
2. 소리 없이 찾아온 죽음의 그림자
그때였다. 커피잔이 흔들린 것이.
'어 이게 뭐지?'
동기 녀석과 같이 계속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불과 1~2초 남짓한 순간이었지만 그때까지도 이것이 무슨 현상이었는지 몰랐다. 그러고 1초 정도 더 지났을까. 땅이 양옆으로 흔들렸다. 롯데월드에 가면 심하게 흔들리는 파도타기 놀이기구가 있지 않나. 놀이기구 자체가 뱅글뱅글 돌면서 바닥도 막 흔들리는 그거. 굳이 비교를 하자면 그런 느낌이랄까. 공짜로 이런 경험을 하게 되다니. 커피는 당연히 쏟아졌다.
동시에 외쳤다. 나는 한국어로, 오스마와 교관은 영어로.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그 느낌 그대로를 살리는 그 대사로.
"씨×!!!!" "F×ck!!!!"
경박하게 보였다면 미안하다. "하하, 이걸 어쩌지. 지금 지진이 일어난 거 같은데 어디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모색해볼까?" 예전에 '타이타닉' 영화를 볼 때 타이타닉이 침몰할 때 끝까지 관현악 3중주를 연주했다는 악사들처럼 멋있게 보이고 싶었으나 깨달은 것은 난 결국 평범한 인간이었다는 것.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후에 기회가 있다면(?) 성공하길 바란다.

▲ 필자가 지진당시 머물고 있었던 필리핀 클락공항. 지진후 승객 터미널 내부가 크게 파손됐다.

▲ 스타벅스로 통하는 몰 입구 역시 지진으로 인해 와장창 깨졌다.
하여튼 인생에서 가장 긴 10초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동안 뇌 기능도 정지되었다. 평소 먹을 것 앞에서나 수업 종료 1분 전에만 빠르게 돌아가는 내 뇌이건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은 건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지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생각했던 나의 모습이란…. 하, 그래도 어디서 배운 건 있었는지 바로 테이블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이제 내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천장이 무너지면 난 죽는다.'
다행히 결과적으로 천장은 무너지지 않았고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동기와 나 그리고 교관은 지진이 일어난 뒤 7~8초 정도쯤이었나 조금 잦아든 틈을 이용해 재빠르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격납고 특성상 만약 이 커다란 돔 천장이 내려앉으면 요단강행 익스프레스였기 때문이다. 밖으로 나오니 새들이 낮게 떼를 지어 날고 있었고, 가로등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유리창이 와장창 깨졌으며 나는 왜 커피잔을 계속 들고 있었는지 나오고 나서야 알게 됐다.

▲ 갑자기 찾아온 지진으로 인해 뛰쳐나온 사람들의 모습

▲ 모두들 무사히 격납고 밖으로 대피했다. 지진은 멎었지만 가로등이 심하게 계속 흔들리고 있다.
3. 그 후 달라진 것들
지진이 일어나자 온 도시가 정전이 됐다. 도시 전체가 암흑으로 가득 차고 자체발전기가 있는 몇몇 가게를 제외하고는 전부 문을 닫아야만 했다. 아니 문을 닫지 않더라도 모든 식기나 전시제품이 쏟아져서 제대로 영업하는 곳이 없었다. 그리고 곧 다시 찾아올 여진에 대해 불안해하면서 그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그날 밤 3번의 여진이 더 있었다. 다행히 심하지는 않았다. 인생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하루가 그렇게 흘러갔다.
그 후 뉴스에서는 루손섬 구타드에서 북북동 방향으로 1㎞ 떨어진 지점에서 규모 6.1의 강진이 발생했다고 소식을 전했다. 지진 피해가 가장 심한 팜팡가주에서 14명이 숨진 것을 비롯해 최소 16명이 숨지고 80여 명이 부상한 것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이 바로 팜팡가주다. 우리 지역 근처에서는 슈퍼마켓이 있는 4층짜리 건물이 무너지면서 20~30명가량이 죽거나 다쳤다. 나도 그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군생활을 의무소방으로 다녀왔기에 각종 사고 현장 그리고 죽음을 참 수 없이도 겪었는데,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어떨 땐 눈물도 흘렸지만 모두 남의 일이었다. 나는 내 인생에서 지진을 처음 겪었다. 그것도 규모 5~6의 지진을. 예전 "나한테 당해봐야만 아나"라고 일갈했던 모 전 대통령이 생각난다. 그땐 공감능력 없다고 비웃었는데 나도 이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거 같다. 네 당신이 맞습니다. 당해봐야지 알더라고요.
나는 특별하지 않다. 죽음은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 인생무상이다. 욕심 부리고 미워하고 증오하고 전부 다 이런 거 의미 없다. 살아 있을 때 서로 아끼자. 떠날 때 후회 없도록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소 내 마음을 잘 전하자. 겸허해지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자. 내가 이번 지진으로 배운 것들이다. 감사합니다.
[Flying J / john.won320@gmail.com]
전체 5,456건 (187/364페이지)
2666
4대째 붓 제작하는 대전 백제필방 이야기
2020.05.30,
조회 13431
[역사공부방]
신상구
&n...
2665
신도시는 구도심 재생과 연계해 개발해야
2020.05.30,
조회 9087
[역사공부방]
신상구
&n...
2664
강한 자는 역사를 고쳐쓴다.
2020.05.29,
조회 11386
[역사공부방]
신상구
&n...
2663
90년 역사의 전남 해남 해창주조장
2020.05.28,
조회 10976
[역사공부방]
신상구
&n...
2662
4차산업혁명에 걸맞는 갑천 도시재생사업
2020.05.28,
조회 9174
[역사공부방]
신상구
&n...
2661
한일관계 연구 권위자 최서면 옹 타계를 슬퍼하며
2020.05.28,
조회 9607
[역사공부방]
신상구
공유하기닫기
&...
2660
2018년 한국 직업 정보 보고서
2020.05.26,
조회 10709
[역사공부방]
신상구
&n...
2659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순수문학과 참여문학 논쟁
2020.05.26,
조회 11105
[역사공부방]
신상구
&...
2658
공화주의의 개념과 중요성
2020.05.26,
조회 11394
[역사공부방]
신상구
&n...
2657
운초 김부용 추모제 유래
2020.05.26,
조회 11669
[역사공부방]
신상구
&n...
2656
미국의 세계적 영도력의 원천
2020.05.25,
조회 9765
[역사공부방]
신상구
&n...
2655
1950~1960년대 상업영화의 대가 한형모 감독 이야기
2020.05.24,
조회 10890
[역사공부방]
신상구
&n...
2654
[문화 이면] 역사의 천사
2020.05.23,
조회 11065
[자유게시글]
환단스토리
[문화 이면] 역사의 천사매일경제 2020-05-23 코로나19가 바꿔놓는 삶의 풍경이 급격하고 가파르다. 인간은 일상이 무너지는 무참함 속에서 대규모 전쟁 말고도 종을 절멸시킬 강력한 요인이 있을 수 있음을 절...
2653
한국 문화재의 보고이자 상징인 간송미술관, 재정난에 보물 2점 경매
2020.05.23,
조회 11257
[역사공부방]
신상구
&n...
2652
김소월 '진달래꽃'이 한국 근대 시의 시작이었다
2020.05.23,
조회 13357
[역사공부방]
신상구
&n...


댓글 0
댓글 내용을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