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의 생애와 업적과 학술정신
2020.06.13 02: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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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의 생애와 업적과 학술정신
1. 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의 생애와 업적
권득기(權得己) 선조 3년인 1570년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예조판서 권극례(權克禮)이고, 어머니는 윤천석(尹天錫)의 딸이다. 큰아버지인 선공감역 권극관(權克寬)에게 입양되었다. 증조할아버지는 권박(權博)이고, 할아버지는 종묘서령 권덕유(權德裕)이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지(重之), 호는 만회(晩悔)이다.
1589년(선조 22)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0년(광해군 2)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예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광해군이 모후를 서궁에 유폐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하는 등 정치가 혼란하여지자 관직을 버리고 충남 태안의 바닷가에 은둔하여 야인생활을 하였다.
권득기는 당대 거유로 박지계(朴知誡, 1573-1635)와는 도의지교이었으나 학문적으로는 격물치지(格物致知) 논쟁을 전개하였다. 이 논쟁은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간의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이나, 성혼(成渾)과 이이(李珥)가 벌인 인심도심론(人心道心論)의 논쟁에 버금가는 성리학적 논쟁이었다. 권득기는 벼슬을 버리고 집에 있을 때에 포저(浦渚) 조익(趙翼)과 편지를 받으며 시국을 논하기도 하였다.
1618년에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이 되었다. 광해군 14년인 1622년에 죽은 뒤 공조참판이 추증되고, 대전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만회집』·『연송잡기(然松雜記)』 등이 있다.
권득기는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적은 음사로 출사하여 선공감역과 함양현감을 지냈다. 2남 權구와 4남 권증(權譄)은 일찍 사망했다. 장녀는 후에 영의정에 오른 심지원(沈之源, 1593-1662)과 결혼했다. 3남 침은 동몽교관으로 출사허여 종친부 전적을 지냈는데 문생과 제자가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 한다. 그의 문인으로 영상(領相) 이여(李畬), 이판(吏判) 이돈(李墩), 승지(承旨) 이학 등이 있다. 5남은 한성부 우윤을 지낸 권시(權諰)이고, 차녀는 한빈(韓彬)과 혼인했다.
2. 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의 학술정신
- 만회 권득기(1570~1622)는 선조와 광해군을 거쳐 인조의 시대를 살아간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철저한 구시(求是)의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 반신순리(反身循理)와 구시를 강조한 권득기는 차선은 선이 아니라고 여기며, 철저하게 지선(至善)을 목표로 살아갔다.
- 시의(時宜)에 입각하되 경장보다는 준수의 입장에서, ‘준수하여 다스리고, 고제(古制)를 회복하여 부흥시킨다[遵守而治, 復古而興]’이라는 상고주의적 논리를 견지했다.
- 정치적 결단과 사회 개혁은 군주의 책무라고 과감하게 지적했지만 군신지의(君臣之義)를 맺었다면 신하의 직분은 벗어날 수 없다는 전통적인 명분론은 견지했다.
- 필부(匹夫)는 영토나 국민이 없으므로, 현실정치에서의 능력이 부재하다는 점을 들어 혁명은 현실화될 수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 그는 문의(文義)・의리(義理)・사증(事證)을 바탕으로 다각적으로 경전을 해석했다. 의리적 해석을 일관되게 관철시킨 이후의 주자학적 해석방법과는 변별되는 것이다. 이는 경전의 본의에 다가서려는 의미있는 시도이고, 설득력을 높이는 데도 효과적이다.
- 그의 『맹자참의(孟子僭疑)』는 주자의 견해에 얽매이지 않고, 상당히 여유롭고 자유롭게『맹자』를 읽어낸 것이다. 역사・현실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경전독서를 당대적 실효로 연결시키려는 경세적 시야도 폭넓게 읽힌다. 이는 조선에서 주자학이 교조화 되기 이전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학자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 경전이 음미될 수 있는가를 확인시켜 주는 의미있는 지점이다. 이는 퇴계 이황의 『맹자석의』보다 휠씬 풍부하고, 사계 김장생의 『맹자변의』와 우암 송시열의 『맹자질의의의』에 비해서는 휠씬 자유로운 것이다.
- 우리는 권득기의 『맹자참의』가 비록 충분하게 구비된 주석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권득기에 이르러 조선의 경전 해석은 한결 더 성숙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Manhoe, Kwon Deuk-gi(1570~1622) is widely known as a conscientious intellectual and scholar who rigorously sought truth and integrity during the period of King Seonjo(宣祖), Gwanghaegun(光海君) and Injo(仁祖) of the Joseon Dynasty. Kwon Deuk-gi who lived a life of seeking truth and integrity while reflecting on himself and following the reason scrupulously adhered to his stance of pursuing virtue with no compromises whatsoever. He put forth a classical logic of ‘ruling by compliance and revival by restoration[遵守而治, 復古而興]’ from the standpoint of compliance rather than Gyeongjang while on the basis of circumstances. Although he boldly pointed out the issue of monarch's responsibility in political duties and reforms, he fell short of escaping the justification that no subject is not supposed to give up on his or her duties once the relationship of sovereign and subject is formed. He made clear that no revolution could be realized under the pretext that commoners have no capacities in realistic politics due to the absence of land or people under their possession and control. It is notable that his interpretation of the Confucian scriptures adopted the methodology of multilateral interpretation based on the semantic and justifiable interpretation and evidences as concrete facts. It was a persuasive attempt to approach the original intention of the Confucian scriptures and was effective in promoting the self-reasoning. His book 『Mengzichamui(孟子僭疑)』 indicates that he have read and interpreted 『Mengzi』 in a rather liberal and relaxed manner without being restricted to the opinions of Chu His(朱熹). It also demonstrates his insight that awakened the world in pursuit of contemporary values from reading the Confucian scriptures while adhering to the stance of realism. This reaffirms that how deeply the Confucian scriptures could be appreciated by critical scholars before neo-Confucianism took root as a standard of dogma of Jeseon Dynasty. It is much more abundant than Toegye Yi Whang(李滉)’s 『Maengjaseokui(孟子釋義)'』 and is a lot more liberal than Sagye Kim Jang-saeng(金長生)’s 『Maengjabyeonyi(孟子辨疑)』 and Wooam Song Si-yeol(宋時烈)’s 『Maengjajiluiuiui(孟子質疑疑義). It cannot be asserted that Kwon Deuk-gi’s 『Mengzi Truth』 is a sufficiently prepared commentary but the interpretation of the Confucian scriptures among the scholars of Joseon is evaluated to have been much more matured and deepened under the influence of Kwon Deuk-gi.>
- <참고문헌>
1. 원영환,「권득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2. 함영대,「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의 학술정신과『맹자참의(孟子僭疑)』」, 한국사상사학회,『한국사상사학』vol., no.55, 2017. pp. 49-78 .
3. 성봉현,「대전에 내거한 안동권씨 권득기와 권시 가문의 가계」, 도산학술연구원, 『제25회 학술강연회 자료』, 2020.6.12. pp.16-17.
- 만회 권득기(1570~1622)는 선조와 광해군을 거쳐 인조의 시대를 살아간 양심적인 지식인으로, 철저한 구시(求是)의 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 반신순리(反身循理)와 구시를 강조한 권득기는 차선은 선이 아니라고 여기며, 철저하게 지선(至善)을 목표로 살아갔다.
- 시의(時宜)에 입각하되 경장보다는 준수의 입장에서, ‘준수하여 다스리고, 고제(古制)를 회복하여 부흥시킨다[遵守而治, 復古而興]’이라는 상고주의적 논리를 견지했다.
- 정치적 결단과 사회 개혁은 군주의 책무라고 과감하게 지적했지만 군신지의(君臣之義)를 맺었다면 신하의 직분은 벗어날 수 없다는 전통적인 명분론은 견지했다.
- 필부(匹夫)는 영토나 국민이 없으므로, 현실정치에서의 능력이 부재하다는 점을 들어 혁명은 현실화될 수 없다고 단언하기도 했다.
- 그는 문의(文義)・의리(義理)・사증(事證)을 바탕으로 다각적으로 경전을 해석했다. 의리적 해석을 일관되게 관철시킨 이후의 주자학적 해석방법과는 변별되는 것이다. 이는 경전의 본의에 다가서려는 의미있는 시도이고, 설득력을 높이는 데도 효과적이다.
- 그의 『맹자참의(孟子僭疑)』는 주자의 견해에 얽매이지 않고, 상당히 여유롭고 자유롭게『맹자』를 읽어낸 것이다. 역사・현실주의적 입장을 견지하면서도 경전독서를 당대적 실효로 연결시키려는 경세적 시야도 폭넓게 읽힌다. 이는 조선에서 주자학이 교조화 되기 이전 비판적인 시각을 지닌 학자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 경전이 음미될 수 있는가를 확인시켜 주는 의미있는 지점이다. 이는 퇴계 이황의 『맹자석의』보다 휠씬 풍부하고, 사계 김장생의 『맹자변의』와 우암 송시열의 『맹자질의의의』에 비해서는 휠씬 자유로운 것이다.
- 우리는 권득기의 『맹자참의』가 비록 충분하게 구비된 주석서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권득기에 이르러 조선의 경전 해석은 한결 더 성숙해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Manhoe, Kwon Deuk-gi(1570~1622) is widely known as a conscientious intellectual and scholar who rigorously sought truth and integrity during the period of King Seonjo(宣祖), Gwanghaegun(光海君) and Injo(仁祖) of the Joseon Dynasty. Kwon Deuk-gi who lived a life of seeking truth and integrity while reflecting on himself and following the reason scrupulously adhered to his stance of pursuing virtue with no compromises whatsoever. He put forth a classical logic of ‘ruling by compliance and revival by restoration[遵守而治, 復古而興]’ from the standpoint of compliance rather than Gyeongjang while on the basis of circumstances. Although he boldly pointed out the issue of monarch's responsibility in political duties and reforms, he fell short of escaping the justification that no subject is not supposed to give up on his or her duties once the relationship of sovereign and subject is formed. He made clear that no revolution could be realized under the pretext that commoners have no capacities in realistic politics due to the absence of land or people under their possession and control. It is notable that his interpretation of the Confucian scriptures adopted the methodology of multilateral interpretation based on the semantic and justifiable interpretation and evidences as concrete facts. It was a persuasive attempt to approach the original intention of the Confucian scriptures and was effective in promoting the self-reasoning. His book 『Mengzichamui(孟子僭疑)』 indicates that he have read and interpreted 『Mengzi』 in a rather liberal and relaxed manner without being restricted to the opinions of Chu His(朱熹). It also demonstrates his insight that awakened the world in pursuit of contemporary values from reading the Confucian scriptures while adhering to the stance of realism. This reaffirms that how deeply the Confucian scriptures could be appreciated by critical scholars before neo-Confucianism took root as a standard of dogma of Jeseon Dynasty. It is much more abundant than Toegye Yi Whang(李滉)’s 『Maengjaseokui(孟子釋義)'』 and is a lot more liberal than Sagye Kim Jang-saeng(金長生)’s 『Maengjabyeonyi(孟子辨疑)』 and Wooam Song Si-yeol(宋時烈)’s 『Maengjajiluiuiui(孟子質疑疑義). It cannot be asserted that Kwon Deuk-gi’s 『Mengzi Truth』 is a sufficiently prepared commentary but the interpretation of the Confucian scriptures among the scholars of Joseon is evaluated to have been much more matured and deepened under the influence of Kwon Deuk-gi.>
- <참고문헌>
1. 원영환,「권득기」,『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1996.
2. 함영대,「만회(晩悔) 권득기(權得己)의 학술정신과『맹자참의(孟子僭疑)』」, 한국사상사학회,『한국사상사학』vol., no.55, 2017. pp. 49-78 .
3. 성봉현,「대전에 내거한 안동권씨 권득기와 권시 가문의 가계」, 도산학술연구원, 『제25회 학술강연회 자료』, 2020.6.12. pp.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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