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생애와 업적
2024.02.15 02:07 |
조회 11344
프랑스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생애와 업적
]
[편집]
위고는 20살이 되던 1822년, 아내 아델과 결혼한 직후 그의 첫 시집인 《오드와 잡영집(Odes et Poésies Diverses, 1822》을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문필활동을 전개하여 시집 《오드와 발라드집(Odes et Ballades, 1826)》, 《동방시집(Les Orientales, 1829)》, 소설 《아이슬란드의 한(Han d'Islande, 1823)》, 《뷔그자르갈(Bug-Jargal, 1826)》, 《사형수 최후의 날(Le Dernier jour d'un condamné, 1829)》 등 왕당파적·가톨릭적인 색채가 농후한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이후, 여러 잡지에 문학평론을 싣기도 하고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간의 문학 논쟁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낭만주의 문학 이념의 초석을 다졌다.
마침내 위고는 희곡 《크롬웰》의 서문 발표를 통해 고전주의 문학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서면서 낭만주의 작가들의 수령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또 크롬웰은 고전주의 연극의 신조였던 이른바 ‘삼일치의 법칙’(행위, 시간, 장소의 통일)을 과감히 깨트린 작품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당대에는 워낙 파격적이어서 상연이 불가능했지만, 그 희곡의 ‘서문’이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위고는 낭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이후 그는 시집 [동방시집](1829)을 간행하고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희곡 에르나니(1830)는 객석에서 고전주의자와 낭만주의자가 저마다 야유와 박수를 보내는 대소동의 와중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고,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1831)은 소설가로서 위고의 명성을 확고히 해 주었다.
1832년에 위고는 쥘리에트 드루에라는 여배우를 처음 만났고, 이후 반세기 동안 지속된 두 사람의 불륜 관계가 시작되었다. 위고의 생애를 이야기하려면 그 주위의 수많은 여인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녀를 넷이나 낳은 본처 아델은 남편의 외도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자신도 비평가 생트뵈브와 외도 행각을 벌였지만, 그래도 40년 넘게 꿋꿋이 가정을 지켰다.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린 위고의 애정 행각은 말년까지도 계속되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웠던 애인은 레 미제라블의 원고를 정서하고 망명지까지 따라가는 등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쥘리에트였다. 1841년에 위고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지만, 1843년 가을에 제일 아끼던 딸 레오폴딘이 익사하는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우울증에 시달린 위고는 작품 활동을 한동안 중단했다(문학사가 랑송은 만약 위고가 이날 이후로 완전 침묵했다 하더라도 문학사에서는 이미 확고한 위치를 마련했을 것이라 단언한다). 대신 정치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위고는 왕실과의 친분으로 1845년에는 자작 작위를 받지만, 그해 여름에 여배우 레오니 당트와의 간통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는 굴욕을 맛본다. 이후 그는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한 채 필생의 대작 레 미제라블의 집필에 몰두한다.
마침내 위고는 희곡 《크롬웰》의 서문 발표를 통해 고전주의 문학에 정면으로 대항하고 나서면서 낭만주의 작가들의 수령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또 크롬웰은 고전주의 연극의 신조였던 이른바 ‘삼일치의 법칙’(행위, 시간, 장소의 통일)을 과감히 깨트린 작품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당대에는 워낙 파격적이어서 상연이 불가능했지만, 그 희곡의 ‘서문’이 열광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위고는 낭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급부상했다. 이후 그는 시집 [동방시집](1829)을 간행하고 문단의 총아가 되었다. 희곡 에르나니(1830)는 객석에서 고전주의자와 낭만주의자가 저마다 야유와 박수를 보내는 대소동의 와중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고,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1831)은 소설가로서 위고의 명성을 확고히 해 주었다.
1832년에 위고는 쥘리에트 드루에라는 여배우를 처음 만났고, 이후 반세기 동안 지속된 두 사람의 불륜 관계가 시작되었다. 위고의 생애를 이야기하려면 그 주위의 수많은 여인들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자녀를 넷이나 낳은 본처 아델은 남편의 외도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자신도 비평가 생트뵈브와 외도 행각을 벌였지만, 그래도 40년 넘게 꿋꿋이 가정을 지켰다.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린 위고의 애정 행각은 말년까지도 계속되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웠던 애인은 레 미제라블의 원고를 정서하고 망명지까지 따라가는 등 그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쥘리에트였다. 1841년에 위고는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으로 선출되었지만, 1843년 가을에 제일 아끼던 딸 레오폴딘이 익사하는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 우울증에 시달린 위고는 작품 활동을 한동안 중단했다(문학사가 랑송은 만약 위고가 이날 이후로 완전 침묵했다 하더라도 문학사에서는 이미 확고한 위치를 마련했을 것이라 단언한다). 대신 정치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 위고는 왕실과의 친분으로 1845년에는 자작 작위를 받지만, 그해 여름에 여배우 레오니 당트와의 간통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는 굴욕을 맛본다. 이후 그는 대외 활동을 중단하고 칩거한 채 필생의 대작 레 미제라블의 집필에 몰두한다.
[편집]
1848년에 2월 혁명이 일어나자 위고는 보궐 선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848년 6월에 제2공화국의 중도노선에 반발한 급진파와 노동자가 봉기했을때에는 의회 대표로서 바리케이드를 친 봉기군에게 파견되어 항복을 권고하는 역할을 맡았다. 투항을 거부하자 국민방위군을 진두지휘하면서 봉기를 진압하는 역할을 맡아야 했다. 위고는 이를 안타깝지만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여겼으나, 이 경험은 훗날 그가 레미제라블을 집필할때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대통령 선거에서 위고는 루이 나폴레옹을 지지했지만, 곧이어 반동 정치가 시작되자 격렬하게 정부를 비판한다. 1851년 12월에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정을 선언하자, 반정부 인사로 낙인 찍힌 위고는 벨기에로 피신한다.
망명 중에도 프랑스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계속 발표하던 위고는 결국 벨기에에서 추방되어 프랑스 서부 해안에서 가까운 영국령 채널 제도의 건지 섬으로 향한다. 부인과 자녀는 물론이고 애인 쥘리에트까지 위고를 따라 함께 망명길에 오른다. 1859년에 루이 나폴레옹은 사면령을 내렸지만, 위고는 이를 거부하고 여전히 망명지에 남아 있었다. 고독한 망명 생활 중에서 창작열은 더욱 뜨거워졌고, 위고의 시집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징벌(Les Châtiments, 1853)》, 《명상시집(Les Contemplations, 1856)》, 《세기의 전설(La Légende des siècles, 1859)》(제1집), 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1862)》, 《바다의 노동자(Les Travailleurs de la Mer, 1866)》등의 대표작이 연이어 간행된다.
1870년에 보불전쟁으로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이 몰락하자, 위고는 9월 5일 밤에 기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해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다. 국회의원에도 당선되었지만 복마전 같은 현실에 실망한 나머지 금세 의원직을 포기한다. 그해 3월 13일에 위고의 큰아들이 갑작스레 사망하고, 불과 일주일 뒤에 파리에서는 코뮌이 수립되었다가 두어 달 만에 분쇄된다. 벨기에에 머물던 위고는 비록 코뮌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 가담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그로 인해 위고는 졸지에 코뮌 동조자로 오해 받아 벨기에에서 추방당했고, 이후 파리로 돌아와서도 냉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망한 위고는 가족과 함께 예전의 망명지인 건지 섬으로 떠나, 그곳에서 1년간 머물며 말년의 대표작인 《93년(Quatrevingt-treize, 1874)》을 집필한다. 1876년에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1878년에 뇌출혈을 일으킴으로써 결국 정계에서 은퇴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위고는 루이 나폴레옹을 지지했지만, 곧이어 반동 정치가 시작되자 격렬하게 정부를 비판한다. 1851년 12월에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제정을 선언하자, 반정부 인사로 낙인 찍힌 위고는 벨기에로 피신한다.
망명 중에도 프랑스 정부를 비판하는 글을 계속 발표하던 위고는 결국 벨기에에서 추방되어 프랑스 서부 해안에서 가까운 영국령 채널 제도의 건지 섬으로 향한다. 부인과 자녀는 물론이고 애인 쥘리에트까지 위고를 따라 함께 망명길에 오른다. 1859년에 루이 나폴레옹은 사면령을 내렸지만, 위고는 이를 거부하고 여전히 망명지에 남아 있었다. 고독한 망명 생활 중에서 창작열은 더욱 뜨거워졌고, 위고의 시집 가운데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징벌(Les Châtiments, 1853)》, 《명상시집(Les Contemplations, 1856)》, 《세기의 전설(La Légende des siècles, 1859)》(제1집), 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 1862)》, 《바다의 노동자(Les Travailleurs de la Mer, 1866)》등의 대표작이 연이어 간행된다.
1870년에 보불전쟁으로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이 몰락하자, 위고는 9월 5일 밤에 기차를 타고 파리에 도착해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는다. 국회의원에도 당선되었지만 복마전 같은 현실에 실망한 나머지 금세 의원직을 포기한다. 그해 3월 13일에 위고의 큰아들이 갑작스레 사망하고, 불과 일주일 뒤에 파리에서는 코뮌이 수립되었다가 두어 달 만에 분쇄된다. 벨기에에 머물던 위고는 비록 코뮌을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그 가담자들을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그로 인해 위고는 졸지에 코뮌 동조자로 오해 받아 벨기에에서 추방당했고, 이후 파리로 돌아와서도 냉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망한 위고는 가족과 함께 예전의 망명지인 건지 섬으로 떠나, 그곳에서 1년간 머물며 말년의 대표작인 《93년(Quatrevingt-treize, 1874)》을 집필한다. 1876년에는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1878년에 뇌출혈을 일으킴으로써 결국 정계에서 은퇴했다.
[편집]
1881년 2월 26일, 위고의 80세 생일은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군중이 그의 집을 찾아와 박수갈채를 보냈다. 생애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한 위고는 8월 31일에 유언장을 썼다.
“신과 영혼, 책임감. 이 세 가지 사상만 있으면 충분하다.
적어도 내겐 충분했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죽을 것이다. 진리와 광명, 정의, 양심, 그것이 바로 신이다. 가난한 사람들 앞으로 4만 프랑의 돈을 남긴다. 극빈자들의 관 만드는 재료를 사는 데 쓰이길 바란다.
내 육신의 눈은 감길 것이나 영혼의 눈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을 것이다. 교회의 기도를 거부한다. 바라는 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단 한 사람의 기도이다.”
2년 뒤에 그는 위의 유언장을 더욱 짧게 고쳐 썼다. 다만, 유언장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남기는 금액이 4만 프랑이라는 이야기와 5만 프랑이라는 이야기가 있어 확실하지 않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5만 프랑을 전한다. 그들의 관 만드는 값으로 사용되길 바란다. 교회의 추도식은 거부한다. 영혼으로부터의 기도를 요구한다. 신을 믿는다.”
1885년 5월 18일에 위고는 폐렴으로 자리에 누웠다. 그리고 22일에 파리 시에서 사망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검은 빛이 보인다.”였다. 그날 밤에 파리에는 천둥과 우박을 동반한 비바람이 몰아쳤다. 6월 1일에 장례식이 국장으로 치러졌고, 200만 명의 인파가 뒤를 따르는 가운데 그의 유해는 팡테옹에 안장되었다. 랑송은 “그의 시신은 밤새도록 횃불에 둘러싸여서 개선문에 안치되었고, 파리의 온 시민이 판테온까지 관의 뒤를 따랐다."고 평했다.
위고의 장례식, 1885년 6월 1일 | 팡테옹 내부에 있는 위고의 무덤 |
대표작으로는 레 미제라블, 노트르담 드 파리, 뤼 블라, 바다의 노동자, 93년,왕은 즐긴다, 사형수 최후의 날 등이 있다.
<참고문헌>
1. 최여정, "프랑스 대문호가 꿈꾼 자유와 희망, 세계에서 노래해요", 조선일보, 2024.2.13일자. A29면.
전체 5,456건 (285/364페이지)
1196
증산도 하면서 갖어야 할 마음가짐
[1]
2013.01.12,
조회 11299
[자유게시글]
김진섭
저는 사실 지금 현재 상생신도입니다. 상생신도가 되었던 것도
사실 1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몇일전 그동안의 나에게 주어졌던 천년묵은 여우의 탈을
벗었더...
1195
희망, 2013
2013.01.07,
조회 9822
[자유게시글]
김성배
희망,
새해,
새 희망으로!
새해에도
늘
건강하시고,
안전운전하세여~
언제나
환한 웃음으로, 희망이와 동무하시고여~
사진 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
1193
내 양심이 곧 부처더라
2012.12.20,
조회 10236
[자유게시글]
참마음
내 양심이 곧 부처더라
현실과 타협 않고 한평생 불가에 쓴소리한 삼성 스님
‘도인 스님’ 경지 이른 뒤 “내 도력은 양심에서 나온 것”
마지막 1년간 문 잠긴 방에서 수행하다 앉은 채 열반
수십년간 지켜본...
1192
이제 당신만의 고전을 쓸 차례다.
2012.12.19,
조회 9278
[자유게시글]
손성일
모든 고전이 애초부터 고전이었던 것은 아니다.
시대의 벽을 넘어 살아남은 후에야 고전의 칭호를
부여받을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당신만의 고전을 쓸 차례다.
당신은 진실을 알고 있는가? 당신은 당신이...
1191
"우리에게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2012.12.19,
조회 9374
[자유게시글]
손성일
입력 : 2011-10-14 14:00:38 | 수정 : 2011-10-14 15:59:17
레스터 브라운 소장, “내가 과장한다는 비판의 근거 없다”
(※ 레스터 브라운 소장의 강연 중 일부 표현은 그의 저서 '앵그리...
1190
언어를 지배하는 자 세상을 지배한다.
2012.12.19,
조회 10313
[자유게시글]
손성일
언어를 지배하는 자 세상을 지배한다.
누구나 시인 [허준혁노트]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하면 누구나 주먹을 쥐고 분노할 것입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이 매화를 '일본 살구(Japanese Plum)'라고 하고 은행나...
1189
매헌 윤봉길 의사 순국 80주년을 삼가 추모하며
2012.12.18,
조회 9301
[자유게시글]
신상구
윤봉길 의사 순국 80주기를 삼가 추모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신상구(辛相龜)
1. 장개석 총통을 감동시...
1188
염표문念標文은 후천 5만년 인류의 교육 헌장
2012.12.16,
조회 8138
[역사]
손성일
환단고기 역주자 안경전 강독
‘염표문’은 신교神敎 헌장憲章으로 11세 도해단군 때 완성되었어요. 염표문, 이 속에 9천년 역사관이 다 들어 있다. 염표문은 뭐냐? 염표문은 우리 생각 속에 천지의 꿈과 이상...
1187
권학문 주자훈(勸學文 朱子訓)
2012.12.11,
조회 7556
[역사]
참마음
勸學文 朱子訓
勿謂今日不學而有來日
말하지 말라 오늘 배우지 않아도 내일이 있다고
勿謂今年不學而有來年
말하지 말라 금년에 배우지 않아도 내년이 있다고
日月逝矣歲不我延
세월은 가...
1186
白衣에 담긴 한민족의 철학
2012.12.09,
조회 5184
[역사]
참마음
오랜 교수직에서 잊혀지지 않는 한 학생의 말이 떠오른다. 내용인즉 “우리 민족은 염색기술이 뒤떨어져 옷에 염색을 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냥 흰옷을 입게 되면서 나온 말이 백의민족이라고 들었습니다.”...
1184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32주년을 경축하며
2012.12.07,
조회 5805
[역사]
신상구
2012년 12월 8일은 대전의 대표적 인물인 단재 신채호 선생 탄신 132주년이 되는 아주 뜻깊은 날입니다. 그래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업적을 기리고, 대전 구도심의 활성화를 기하는 한편, 대전의 도시 정채성을...
1183
우리는 행복할 의무가 있다.
2012.12.06,
조회 9942
[자유게시글]
참마음
우리는 행복할 의무가 있다.
행복할 의무를 마치 종교처럼 신봉해야 한다.
우리가 행복하지 못할 때 하는 행위는 무엇이나 잘못된 것 투성이다.
불행에서 행복으로, 극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행복감이 행위의...
1182
어제 출근길 트위터에 올라온 글을 보다..
2012.12.04,
조회 11162
[자유게시글]
홍문화
어제 출근 지하철안에서 본 어느 트윗 하나
이 시대의 비극을 본 것 같아 마음 한켠이 아려온다.
가장 싼 금은 최저임금이다.
최저임금 5천원도 높다고 부결시킨 사람들. 난 당신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하고...











댓글 0
댓글 내용을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