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립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해 유가족 한 풀어줘야
<특별기고> 이유립 선생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해 유가족 한 풀어줘야
.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2호) 대산 신상구
지난 8월 15일은 광복 73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날이었다.
해방 이후 친일 매국노들과 그 후손들이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떵떵거리며 잘 살고 있는 데 반해, 항일독립유공자들과 그 후손들은 가난하여 배우지 못하고 국가로부터 푸대접을 받아 대부분이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되는 바람에 궁핍하게 살고 있어 민족정기가 바로 서지 못하고 있다.
재야 민족사학자로서 지금 가장 아쉽고 서글픈 것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항일독립운동가들 중 상당수가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운동가로 인정을 받지 못해 궁핍하게 살고 있고,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되고 잃어버린 한민족사가 강단사학을 장악하고 있는 식민사학자들의 방해 공작에 의해 올바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암당(寒闇堂) 이유립(李裕岦, 1907-1986) 선생은 한일합방 직전인 1907년 평북 삭주의 명문대가인 철성이씨 가문에서 태어나 일평생 2대에 걸쳐 항일독립운동을 하고, 민족사학 연구에 정진하는가 하면, 전국에 5,000여 명의 제자들을 양성하고, 정통국사 광복운동을 전개하는 등으로 대한민국의 독립과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멸실된 한국사를 바로 세우고 정립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그는 삭주와 만주를 오가며 신안동의 항일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조선독립소년단․의민사·천마산대(서로군정서 별영) 등 항일독립단체의 소년통신원으로, 신간회 삭주지부 발기인으로 항일독립운동을 전개하여 조국의 독립에 크게 기여했다.
1948년 월남하여 대전과 수도권에 거주하면서 일정한 직업이 없어 항상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선비정신을 잃지 않고 올곧게 살면서 ‘대배달민족사’ 5권을 발간하여 이암․이맥․이기․계연수․신채호․정인보로 이어져 온 한국선도와 민족사학의 맥을 잇고, 1983년에 ‘환단고기’ 배달의숙본을 처음으로 공개해 역사학계를 놀라게 했는가 하면, 방송 출연과 신문 보도 및 강연을 통해 일반 국민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주는 데에 크게 공헌했다.
강화도 마니산에 개천각을 세워 성역화하고 매년 2회 이상 제천행사를 하여 나라와 겨레 사랑의 전통을 수립했다. 그리하여 우인(雨人) 송지영(宋志英)은 이유립 선생을 “독립운동가로 국사 광복군으로 초지일관한 진정한 지사”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고 백산(白山) 박성수(朴成壽) 선생은 이유립 선생을 ‘국사의 아버지’라고 호칭했다.
이유립 선생은 동향의 오봉록 지사가 독립운동가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적극 도와주면서도 정작 자기가 독립운동가로 지정받는 데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유립 선생은 지금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해 연금을 받을 수 없고, 그의 시신은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하고 있으며, 그의 부인 신유경(97세)과 자녀들은 대전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다가 최근 타계했다. 그리고 이유립 선생이 13년간 거주하며 민족사를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며 정통국사 광복운동을 전개하던 대전 중구 은행동 목척시장 뒷골목에 위치하고 있는 춥고 어둡고 비좁은 한암당(寒闇堂)은 방치되어 흉물로 전락한지 오래되었다.
이유립 선생이 혹시 항일독립운동을 하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변절해서 친일활동을 하는 바람에 그렇게 홀대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11월 8일에 발간한 ‘친일인명사전’ 3권을 구해 정독해 보았으나 이유립 선생은 친일반민족행위자 4,776명 중에 포함되지 않아 안심이 되었다.
그러니 73주년 광복절을 계기로 국가보훈처가 이유립 선생을 항일독립유공자로 인정해 포상하고 그의 시신을 국립묘지에 안장해 유가족들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대전광역시가 한암당을 재개발하는 과정에서 이유립 기념비나 기념관을 세워 체험교육장이나 관광자원으로 활용해 침체된 대전 구도심을 활성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서울일보, 2018.8.19일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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