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변호사 박준영 이야기

2025.12.08 18:21 | 조회 2159

   

                                           인권 변호사 박준영 이야기

 

1974년 10월 29일, 전라남도 완도군 노화면(현 완도군 노화읍)에서 태어났다. 노화중학교, 노화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목포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했으나 1학기만 다니고 중퇴했다. 즉, 몇 안되는 고졸 출신 변호사 중 하나. 박준영 변호사보다 기수 후배인 고졸 법조인은 단 3명뿐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입학 당시만 해도 착실했으나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등 가정의 불행으로 고등학교 시절엔 문제아였다고 한다. 가출하고 돈을 벌던 참이었는데 고등학교 졸업장만은 따라는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으로 마음을 잡아 졸업하고 가까스로 대학에도 진학한다. 그러나 군대를 갔다 와서 대학을 자퇴하고 사법시험 준비를 하게되는데, 그 계기가 자기보다 잘난 것도 없던 친구들이 "행세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인생 역전을 항상 꿈꾸던 중, 군대에서 만나 친해진 선임이 법대생이었는데 제대하고 바로 사법시험을 준비할 거라는 말을 듣고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어, 제대를 하자, 본인보다 먼저 제대하고 이미 고시촌에서 사법시험을 공부하던 선임에게 연락하고 찾아가 함께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의 모습에 비하면 참으로 소박한 동기였다고 할 수 있겠으나, 본인은 이 결정 이후 정말 죽도록 고생을 했다고 한다. 법대생들의 고시 공부 타입상 한 학기 고시 공부하고, 한 학기 대학다니는게 정석이라 선임이 고시 공부 시즌이 끝나고 복학 시즌이 되어 떠나게 되자 선임의 고시원에 얹혀 살던 박준영은 혼자 공부해야 하는 입장이 되면서 상당히 힘들어졌다고. 이후에도 몇번의 불합격을 겪으면서, 정말 극한의 고통을 느끼며 살면서도 목숨 건 노력으로 버텨서 결국 합격하게 되었다고 한다.

 

2002년 제4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2006년에 사법연수원을 수료했다. 사법연수원 기수는 35기. 이후 수원시에서 변호사로 개업했다.

2.1. 재심 전문 변호사로[편집]

그런데 2007년, 수원역 노숙 소녀 살인 사건을 국선변호인으로서 변호하게 된다. 처음에는 유명해지고 싶어서, 그리고 변호사 일에 도움이 될까해서 시작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사건을 맡고는 이길 가능성이 없어 보여[5] 진지하게 할 마음이 없었고 솔직히 초반 한달 정도는 스스로 생각해도 성의도 별로없게 조사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일로 인해 마음의 충격을 받고 태도가 점점 변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건 바로 누명을 쓴 가출청소년들을 과거에 돌봤던 청소년센터 소장과 선생님이 자신들에게 무고와 억울함을 호소했던 청소년이 있으니 제발 구해달라고 호소를 하자, "그럼 선생님들이 사건자료를 분석하신다면 진지하게 하겠다"고 요구하면서 속으로는 '자기들도 자기들 일로 피곤한데 대충하다가 그만둘거다'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예상을 완전히 깨버리고, 그 선생님들은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이를 통해 충격을 받았고, 박준영의 마음이 조금씩 변하게 되었다.

 

그들이 퇴근 후, 박준영의 사무실에 와서 수 주간 매일 검찰의 수사기록을 5시간 이상씩 분석해서 의심쟁점을 전부 다 분석한 것이다. 이를 본 박준영은 그들의 필사적 태도에 감동을 받으면서 그 의심가는 쟁점들을 자신도 진지하게 분석하였고, 구치소의 피의자들을 찾아가 사건경위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하였고, 결국 경찰과 검찰의 조작에 의해 그들이 누명을 썼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어 이 일의 진위를 밝히는 것에 모든 것을 걸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당시 처음 만났을때와 달리 다음에 구치소에 찾아가 피의자들의 억울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아프고 눈물이 나왔다고 한다.

 

중요했던 것은 사건당일 현장인 학교주변 CCTV 영상들이 명확히 있었음에도 경찰이 확보하지 않아 시간이 지나 자동 삭제되게 만들었고, 현장검증 때 피의자들에게 모든 행위를 경찰이 지시했다는 부분이었다. 피의자들에게 너무 세세한 행위들을 경찰이 말로 설명한 뒤 피의자들이 움직이게 시키고 있었다.

 

수원 사건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사실 피의자들이 폭행한 사람[6]과 살해당한 피해자가 서로 아무상관도 없는 전혀 다른 사람임을 밝혀내, 재심[7]을 이끌어 낸 후 재심 전문 변호사로 떠올랐다. 이 사건은 인간 박준영의 인생 자체를 바꾼 사건으로 스스로 지칭할 정도이며, 그렇기에 다른 재심 사건으로 방송에 나오거나 신문인터뷰를 할때에도 자기 인생 이야기가 나오면 무조건 수원 노숙소녀 사건을 스스로 반드시 이야기한다. 자기 자신을 속물[8]이었다고 자칭하였고 사람이 변한다는 것도 잘 안 믿던 사람이었으나, 정말 이 한 가지 사건으로 자신이란 사람이 많이 변해가는 걸 느꼈다고 한다.

 

수원역 재심사건 1심까지는 본인이 공격적으로 나오지 않아졌다고 판단하여[9], 2심에서 처음으로 검찰과 경찰이 사건을 "조작"했다는 표현을 써서 정식 서면에 기재하여 제출하며 목숨을 걸고 재판에 임했고 자신이 완전히 변해가기 시작했다고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에는 장경욱 변호사의 권유에 따라 서울시 공무원 간첩조작 사건의 변호인단으로 참여했으며 이로 인해 국정원 조사를 받는 등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10]

 

재심 사건을 많이 맡게 되면서 수입이 줄어들어 이미 사무실 직원도 다 내보내고, 이후에는 직원도 없이 혼자 일하는 사무실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편지들이 수없이 쌓인다고 한다. 인터뷰. 재심이 필요한 힘 없고 경제적으로 부족한 사람들은 대개 박 변호사에게 수임료조차 주기 힘든 사람들이 대부분인 반면, 확정 판결 난 사건을 다시 재판해달라고 하려면 엄청난 노력과 준비가 필요[11]하여 다른 영리활동과 병행하기란 불가능하다. 변호사들이 자조 반 농담 반으로 하는 말 중에 "무죄 변론해 달라는 사건이 자꾸만 들어오는 것은 그 사무실이 망할 조짐"이라는 것이 있는데 보도대로라면 딱 그 격언대로 된 셈이다.

2.2. 사실상 파산과 재기[편집]

결국 2016년 8월에 사실상 파산을 선언하였다. 이젠 월세조차 감당할 수 없어 사무실도 정리하였다고. 박 변호사는 고민 끝에 함께하는 박상규 기자에게 요청하여 스토리펀딩을 열었다. 한겨레의 정치 팟캐스트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출연해서 한 말에 따르면, 1억 원짜리 마이너스통장의 만기 연장이 안 돼서 스토리펀딩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한다.[12] 만기 연장만 되었어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다고.

 

하나도 거룩하지 않은 ‘파산’ 변호사

 

다행히 스토리펀딩에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호응하여 주었다고 한다. ‘망한’ 변호사에서 ‘희망’ 변호사로 기사에는 3억 원 달성으로 되어 있으나 펀드 마감 기준으로 목표의 567%인 5억 6천만 원도 넘어갔다. 대신, 그는 이런 금전적 도움이 있기 때문에 양심적으로 수임료를 받고 하는 변호 수임은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물론 그런 수임이 많이 들어오긴 하는데, 거부하고 있다고. 간단히 말해 변호사 수임을 할 만한 경제적 사정이 되는 사람들에게 하는 변호 대신, 돈과 권력 없이 억울한 일을 당한 사법 약자들의 재심을 위한 변호 일만 하겠다는 뜻. 공영방송에서 한 인터뷰에 따르면, 수임료를 받는 사건을 맡으면 우선적으로 돈을 낸 사람의 사건을 먼저 처리하는 것이 옳기 때문에, 없는 사람을 위한 일을 할 수 없어서 수임료 내는 사건을 거부한다고 한다.

 

스토리펀딩과 재심을 위해 노력한 경력이 화제가 되면서, 강연 요청, 방송 출연 요청 등이 어느 정도 들어와서 앞으로도 그걸로 수입을 충당하고, 순수 변호사로서의 일은 사법 약자를 위한 재판만을 하며 살 마음이라고 한다. 강연을 한달에 20건 이상 할 때도 있었을 정도로 많이 한다고. 맡고 있는 재심들이 끝나 여유가 생긴 후에는, 100% 재심만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사법 약자들이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리는 재판에도 무료 변호인으로 나설 마음이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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