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애거사(北崖居士) 범장(范樟)

2025.12.21 21:48 | 조회 1962

   범장(范樟)은 본명이 범세동(范世東)이며, 자는 여명(汝明), 호는 복애(伏崖) 또는 휴애(休崖)로도 불립니다.

   고려말에 금성錦城(현 전라남도 나주)에서 태어난 범장은 여말 충신으로 잘 알려진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제자라고도 한다.(역사적 연대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어 새로운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호는 복애伏崖이고, 복애거사로도 불리었다. 생몰년도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범장의 호인 복애伏崖가 '휴애休崖'의 오기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증손 범석희范錫熙가 필사한 범장의 저서『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는 복애를 범자의 호로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조선총돕구 중추원에서 간행한 『조선인명사서朝鮮人名辭書』(1937)에도 "자字는 여명보汝明甫, 호는 복애伏崖"라 기록되어 있다. 범장의 증조부 범승조范承祖는 남송南宋 때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냈는데 원元에게 남송이 멸망하자(1279) 고려에 망명하였다. 조부 범유수范有睢가 여진족 정벌에 공이 있어 금성군錦城君에 책봉된 것을 계기로, 금성錦城 범씨范氏가 되었다.

   범장의 생애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의 관직 생활이 전부이다. 범장은 공민왕 18년(1369)에 문과에 급제하여 덕녕부윤德寧府尹에 이어 낭사郎舍의 수장인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다. 1335년에 천보산에서 이암, 이명과 함께 소전거사로부터 비서를 전수받은 지 30년이 더 지나 뒤늦게 관직에 발을 들인 것이다. 낭사는 고려의 핵심 관청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속한 관리로, 임금에게 건의와 충언을 드리는 직책이었다. 그러한 낭사 중에서도 최고위인 간의대부로서, 임금의 처사에 대하여 간언하고 이미 내린 조칙이라도 부당하면 되돌리는 일을 행하려면 강직하고 해박한 자라야 가능한 것이다. 간의대부라는 직책만으로도 범장의 성품과 학식을 미루어 볼 수가 있겠다.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범장은 사관의 뜻을 꺾고 벼슬에서 물러나 뜻을 같이하는 70여 명과 함께 만수산萬壽山 두문동에 은거하였다. 조선의 태조와 태종이 여러 차례 벼슬을 권했으나,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끝내 출사하지 않고, 고향(현 광주광역시 광산구 덕림동 복만마을)으로 내려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중국 서적 『고려사사적개요高麗史史籍槪要』에 의하면, 고향에 돌아온 범장은 자신이 즐겨 노닐던 곳인 '복암伏岩'을 따서 호를 '복애'라 하였다 한다. 저서로는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 그리고 원천석元天錫과 함께 편찬한 『華海師全』(정몽주의 스승인 신현申賢의 행적과 고려 말 역사를 기록한 책) 등이 있다.

   범장은 조정에 출사하기 34년 전 젊은 시절(1335)에 이암, 이명과 함께 소전거사로부터 고서를 전수받았다. 그때 세 사람은 국호만 살아 있을 뿐 주권을 상실한 고려의 현실을 통탄하며 반드시 한민족사를 되찾을 것을 굳게 결의하였을 것이다. 이후 범장이 쓴 책이 바로 『북부여기』와 『가섭원부여기』이다. 출사하기 전에 썼는지, 고려가 망한 후에 낙향하여 썼는지 그 시기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원나라의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가 다시 일어나 한민족의 옛 영광을 회복하여 고조선→북부여(열국시대)→오국시대→남북국시대→고려로 이어지는 국통 맥을 후대에 온전히 전하기를 바라는 애국충정의 발로에서 부여사를 저술하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우리 역사의 참 모습을 드러낸 이 공덕은 천추만대에 길이 남아야 하며, 길이 남을 것이다. <환단고기 역주본『환단고기』는 어떤 책인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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