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의 철학
역사학의 철학
“자칫 역사학이란 학문 자체가 정치에 예속될까 우려되는 상황입니다. 지금 우리 역사학계는 역사관(歷史觀·역사를 파악하고 해석하는 근본적인 관점)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너무나 많이 좌우되고 있습니다.”
이한구(李漢龜) 성균관대 철학과 교수(전 한국철학회 회장)가 24일 인터뷰에서 한국 역사학계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3년 동안의 집필 끝에 최근 600쪽이 넘는 연구서 한 권을 냈다. 자신의 전공인 역사철학 분야에서 새로운 논점을 제시한 ‘역사학의 철학’(민음사)이다.
이 책에서 그는 현재 국내외 역사학계를 풍미하는 ‘상대주의 역사학’에 대해 반박했다. ‘역사의 객관성’에 대해 회의적인 상대주의 역사학은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라는 현재주의, ‘역사는 필요에 의해 쓰여진다’는 실용주의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탈(脫)근대주의적인 이 관점으로는, 체계적인 역사 서술이 아니라 단편적인 자료들의 집적만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교수의 관점은 영국 철학자 칼 포퍼(Popper)에서 비롯된 비판적 합리주의를 계승하는 것이다. 그가 보기에 상대주의적 관점은 역사를 ‘만들어 낸 이야기’로 보는 반실재론(反實在論)이다. 그러나 물리학에는 객관성이 있으면서 역사학에는 객관성이 없다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그는 역사관을 지니고서도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역사관 없는 역사 서술은 맹목이고, 객관적 역사 서술 없는 역사관은 공허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역사관을 과학 탐구에서의 핵심적인 가설처럼 여겨야 한다. 복잡다단한 역사 세계를 해석하는 데 있어 과연 어느 역사관이 가장 체계적이고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지 끊임없이 비판하고 비교하며, 나아가 새 역사관을 창조함으로써 객관적 역사 서술에 근접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확한 지도를 그리는 것이 어렵다고 해서 지도를 제멋대로 그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지도가 아니라 예술일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가 보기에 현재 한국 역사학계는 ‘역사관’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있다. “마치 정치적 이념처럼 역사가가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인 줄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판적인 검토 없이 역사관의 도식을 맹목적으로 끼워 맞춘다면 허구적인 역사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높습니다.” 유물사관(마르크스)과 민족사관(헤르더) 모두 근대 서구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대화와 비판을 거부한 채 한국사에 그대로 적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중국·일본과의 ‘역사 전쟁’ 역시 학문 밖의 차원에서 개입하면 학문이 아니라 정치적 투쟁이 될 뿐이며, 사실에 대한 존중이 없는 탈근대주의 역사학이 아니라 객관주의 역사학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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