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 김홍도의 생애와 업적

2026.04.05 20:29 | 조회 446

                                  

                                        단원 김홍도의 생애와 업적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1806)는 1745년 경기도 안산군 군내면 성경에서 아버지 김석무(金錫武)와 어머니 인동 장씨(仁同 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해 김씨 삼현파 17세손이며, 탁영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이다. 7대조부 김수원(金秀源)은 조선 선조 때 내금위장을, 6대조부 김흥상(金興祥)은 어모장군을, 5대조부 김득남(金得男)은 수문장을, 고조부 김중현(金重鉉)은 별제를, 증조부 김진창(金震昌)이 만호 벼슬을 지냈다. 대대로 하급무관을 지낸 중인 집안이었다. 할아버지 김수성(金壽星)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외아들 김양기(金良驥)도 산수화와 화조도를 잘 그린 화가이다. 김홍도의 호로 가장 유명한 "단원"(檀園)은 명나라의 문인화가 단원 이유방(檀園 李琉芳, 1575~1629)의 호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단로"(檀老)나 "단옹"(檀翁)이라는 호는 모두 "단원"을 응용한 노년 무렵의 호다. 그의 유년시절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김홍도에 관한 문헌인 오세창의 편저인 《근역서화징》속에 들어있는〈호산외사〉에도 가장 중요한 김홍도의 생부모와, 형제관계, 본처와 자녀관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며, 강세황이 지은 《단원기》(檀園記)에만 김홍도가 젖니를 갈 나이 때부터 강세황의 집에 자주 드나들면서 화법(畵法)을 배웠다고 한다. 이렇게 김홍도의 유년시절이 베일에 가려진 것은〈호산외사〉를 저술한 조희룡(趙熙龍)이 김홍도를 평소에 숭배한 나머지 상세한 사실은 의식적으로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강세황(姜世晃)의『단원기(檀園記)』에는 무반가의 서얼 집안 출생으로, 10~14살 무렵에 유생(儒生) 강세황의 안산 집에 드나들며 ‘화결(畵訣)’, 즉 그림 그리는 방법을 배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대중(成大中)의 아들 성해응(成海應)은 그가 심사정(沈師正)에게 그림을 배웠고 정선(鄭敾)의 화법도 섭렵했다고 언급했다.

   18~19세 무렵 예조 소속의 도화서 화원이 된 것으로 추정되며, 21세 때인 1765년(영조 41) 『경현당수작도계병(景賢堂受爵圖契屛)』을 제작하였다. 1773년(영조 49) 1월에 거행된 영조 어진 제작 때 동참화사(同參畫師)로 발탁되어 어용화사(御用畫師)의 반열에 올랐다. 같은 해 2월 궁중에서 사용하는 어류와 식염, 연료 등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사재감의 종6품 주부직에 임용되었다. 이후 4개월 뒤에 치러진 수령강(守令講)주1에 응시하였는데, 성적 불량으로 탈락하였다. 한 달 뒤인 7월 16일, 궁중의 화원과 화초, 과일의 관리 및 식목 등의 조경 업무를 하는 공조 소속 장원서의 종6품 별제직에 임명되었다.

   1781년(정조 5) 8월 26일에서 9월 16일 사이에 거행된 정조의 31세 초상 도사(圖寫) 때 어용화사로 발탁되었고, 그 공으로 예조 소속 동빙고의 별제직을 받았다. 이어 1783년(정조 7) 12월 28일 자로 종6품 동반 외직인 안기도(安奇道) 찰방으로 발령받고 다음 해 정월 부임하여 2년 5개월간 근무하였다. 이후 상경하여 규장각에 드나들며 도화서 화원 업무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1788년(정조 12) 정조의 명을 받아 김응환(金應煥)과 함께 금강산을 비롯한 영동 9군의 명승, 명소를 답사하며 50여 일 동안 ‘봉명사경(奉命寫景)’주2을 수행했다. 당시 그린 초본을 토대로 청록풍의 횡권식과 수묵담채풍의 화첩식을 어람용으로 진상했다. 1790년(정조 14) 7월경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의 원찰로 세운 용주사의 불화 제작을 주관하였다. 이때 김득신과 이명기가 감동(監董)으로 함께 종사했다.

1791년(정조 15) 9월, 정조 어진 원유관본(遠遊冠本) 제작에 또다시 동참화사로 선정되었다. 그 공로로 충청도 연풍 현감을 제수받고 1792년(정조 16) 정월부터 1795년(정조 19) 정월까지 3년간 직을 수행했다. 1795년 도화서로 복귀한 뒤, 혜경궁 홍씨 회갑연과 참배 행사의 전모를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의 삽도 제작 주관자로 추천되었다. 1796년(정조 20)에는 화성 완공을 계기로 궁중 내입용 「화성추팔경도(華城秋八景圖)」 병풍 등을 그렸다.

   1800년(정조 24), 김홍도를 특별 대우해 주던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그의 입지에도 변화가 생겼다. 1804년(순조 4) 5월 5일 단오절에 규장각 차비대령화원으로 차정되어 그간 면제받던 녹취재에 응해야 했던 것에서 그를 둘러싼 환경의 변화를 단적으로 읽을 수 있다. 이후 병고와 가난으로 인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이며, 1805년(순조 5) 동짓날에 절필작으로 추정되는 「추성부도(秋聲賦圖)」를 그렸다. 「추성부도」 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806년(순조 6) 초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대 최고의 화원 화가로서 산수화, 도석인물화, 풍속화, 화조화 등 모든 화목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정조는 “회사(繪事)에 속하는 일이면 모두 홍도에게 주장하게 했다.”라고 할 만큼 그를 총애했다. 서른 살이나 어린 그를 가장 아꼈던 강세황은 김홍도의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에 대해 ‘신필(神筆)’이라 평가했고, 『단원기』에서는 천지개벽 이전의 혼돈한 상태를 깨뜨려 연다는 뜻의 ‘파천황(破天荒)’이라 적었다.

   또한 조희룡(趙熙龍)은 『호산외사(壺山外史)』에서 김홍도가 신선에 능했다고 평한 바 있는데, 리움미술관 소장 8폭 병풍인 「군선도(群仙圖)」는 이러한 평을 증명해 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김홍도의 회화는 크게 40세를 전후로 나눌 수 있다. 전기는 도화서 화원으로 그림에 전념하던 시기이고, 후기는 두 차례 지방관 생활을 하며 다양한 화목을 소화하던 시기이다. 정조의 화원이었던 그는 이미 40세 이전에 문인 사대부와 여항 문인의 그림 주문을 받았다. 예컨대 1773년(영조 49) 정범조(丁範祖)에게 「신언인도(愼言人圖)」를, 1779년(정조 3) 어용빈(魚用賓)에게 「송월도」를 주었고, 1778년(정조 2)에는 역관 이민식(李敏埴)을 위해 「서원아집도」 부채를 그렸다. 34세 여름에 완성한 「서원아집도」는 중국 북송의 정원 아회(雅會) 장면인 서원아집을 도해한 수응화(酬應畵)주3이다. 그의 화필은 연풍현감을 지낸 50대 이후 더욱 무르익었다. 봉명사경으로 금강산 일대를 주유하며 그린 금강산도를 보면 정선, 심사정, 김응환의 화법을 토대로 하되 개성 있는 필묵으로 한국의 실경을 재현했음이 확인된다. 또한 당시 문인 사대부 관료 및 일반 백성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풍속화류도 적지 않게 남겼다. 그리하여 단원 김홍도는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과 함께 조선의 삼원에 속한다.

                                              <참고문헌>

『표암유고(豹菴遺稿)』,『호산외사(壺山外史)』,『정조실록(正祖實錄)』,『순조실록(純祖實錄)』,『일성록(日省錄)』,『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내각일기(內閣日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장진성, 『단원 김홍도: 대중적 오해와 역사적 진실』,사회평론아카데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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