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열사의 그늘에 가려 외면당하는 항일독립투사 김구응 선생
2014.10.24 02:24 |
조회 11051
유관순 열사의 그늘에 가려 외면당하는 항일독립투사 김구응 선생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신상구(辛相龜)
1. 유관순 열사, 일본도 가르치는데 한국은 외면
2014년 10월 21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한선교 의원(용인병)에 따르면 일본 중학교 교과서 전체 7종 중 2종에서, 고등학교 일본 근현대사(일본사A) 교과서 7종 중 4종에서, 일본 통사(일본사B) 교과서 8종 중 2종에서, 그리고 세계 근현대사 9종 중 1종에서 유관순 열사에 대해 기록돼 있다.
반면 국내 중학교 역사 교과서 9종 중 본문에 유관순 열사 내용이 수록된 교과서는 2종에 불과하며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 중에는 단 1종에 그친 것으로 확인됐다.
제국서원(Teikoku Shoin)에서 나온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 193페이지에는 "서울여자학교에 재학 중에 3·1운동과 접한 유관순은 운동에 참가했지만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기 때문에 체포됐다. 옥중에서도 그 의지를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16세에 옥사했다"고 기술돼 있다.
청수서원(Shimizu Shoin)에서 나온 중학교 역사 교과서 214페이지에는 "릴리프 중앙의 소녀(유관순)는 15세에 참가해서 후에 데모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서 1920년에 16세의 나이로 옥사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1. 유관순 열사, 일본도 가르치는데 한국은 외면
2014년 10월 21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새누리당 한선교 의원(용인병)에 따르면 일본 중학교 교과서 전체 7종 중 2종에서, 고등학교 일본 근현대사(일본사A) 교과서 7종 중 4종에서, 일본 통사(일본사B) 교과서 8종 중 2종에서, 그리고 세계 근현대사 9종 중 1종에서 유관순 열사에 대해 기록돼 있다.
반면 국내 중학교 역사 교과서 9종 중 본문에 유관순 열사 내용이 수록된 교과서는 2종에 불과하며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 중에는 단 1종에 그친 것으로 확인됐다.
제국서원(Teikoku Shoin)에서 나온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 193페이지에는 "서울여자학교에 재학 중에 3·1운동과 접한 유관순은 운동에 참가했지만 '조선독립만세'를 외쳤기 때문에 체포됐다. 옥중에서도 그 의지를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16세에 옥사했다"고 기술돼 있다.
청수서원(Shimizu Shoin)에서 나온 중학교 역사 교과서 214페이지에는 "릴리프 중앙의 소녀(유관순)는 15세에 참가해서 후에 데모를 조직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붙잡혀서 1920년에 16세의 나이로 옥사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2. 유관순 열사 열웅 만들기에 희생된 항일독립투사들
더 큰 문제는 유관순 열사를 영웅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를 지도해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독립투사들이 외면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유관순 열사와 함께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유중무, 이백하, 조인원, 김구응 선생은 이제까지 조사연구가 잘 안 되고, 추모사업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그래도 이백하 선생은 향토사학자인 신상구 박사의 희생적인 조사연구와 언론활동으로 최근 신문과 방송에 여러 차례 소개되어 뒤늦게나마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신상구 박사는 2008년 말에 <포암 이백하 선생의 생와 업적>이란 논문을 발표해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리고 이백하 선생이 기초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를 발굴해 YTN TV 방송과 KBS 대전방송국 라티오방송에 방영된 바 있으며, 중앙신문(동아일보, 문화일보, 경향신문, 서울일보)과 지방신문(대전일보, 충청일보, 충청투데이, 중도일보, 충청타임즈, 충북일보, 중앙매일, 대전투데이, 충청신문, 충청매일, 중부매일, 충남시사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또한 계간지인『충남예술』과 천안중 교지인 <천웅>에 이백하 선생의 생와와 업적을 소개한 소논문을 게재한 바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유중무, 조인원, 김구응 선생은 조사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3. 항일독립투사 김구응 선생의 생애와 업적
1) 장명학교와 진명학교 교사로 민족교육 실시
항일독립투사 김구응(金球應) 선생은 1887년 7월 27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가전리 99번지 백전(栢田) 마을의 안동김씨(安東金氏) 문중에서 부 김상목(金相睦)과 모 최정철(崔貞徹)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운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장군의 12세 손이다.
그는 5세부터 한학을 수학하는 한편 신학문을 익혔다. 20세부터는 교육을 통해 문맹을 퇴치하는 것이 조국 독립의 첩경이라 인식하고 고향 동리에 청신의숙(靑新義塾)을 개설하고 신학문과 구학문을 직접 가르쳤다. 또한 그는 광복회 유창순(庾昌淳), 김상훈(金相訓) 등과 수시로 협의하여 독립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고 농촌계몽운동에 전념했다.
그 후 28세부터는 수신면 장산리 장명학교(長命學校) 교장인 일인 우에다(植田)) 밑에서 훈도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조만형(趙萬衡)과 유관순 열사의 오라버니 유관옥(柳寬玉)을 제자로 가르치면서 항상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31세 때인 1918년부터는 병천면 병천리에서 미국인 구세실 신부가 경영하는 진명학교(進明學校)에서 훈도생활을 하다가 이듬 해인 1919년 4월 1일에 아우내장터 독립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2) 병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주재소 앞에서 총살당함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홍일선(洪鎰善)이 만세운동을 발의하였으며 김교선(金敎善)이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29일 한동규(韓東奎)와 이순구(李旬求)에게 그 취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얻었으며 한동규는 이백하(李栢夏)에게 함께 참여하도록 권유하여 찬동을 얻었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한 유관순은 3월 13일 귀향하여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조인원(趙仁元) 그리고 숙부 유중무(柳重武)에게 서울의 상황을 전하자 이들은 4월 1일 병천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31일 밤 자정에 병천 시장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과 수신면 산마루 및 진천 고개마루에 거사를 알리는 봉화횃불을 올렸다. 야간을 이용해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고, 천안쪽 길목은 조병호(趙炳鎬)가, 수신면 쪽은 조만형(趙萬衡)이, 충북 진천 쪽은 박봉래(朴鳳來)가 맡아 만세를 권유하기로 하였다.
4월 1일이 되자 각지에 통하는 도로를 책임분담하고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홍일선과 김교선 등은 병천시장에 나가 만세시위의 참여를 권유하였다. 그리고 헌병주재소로 통하는 전화선을 절단하고 시위집회를 거행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포함 이백하 선생이 기초한 구국동지회 명의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니, 아우내 장터는 만세소리로 가득찼다. 시위군중이 계속 독립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고 일본 헌병주재소로 접근 하자, 시위군중의 기세에 놀란 일본 군경들이 주재소에서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되어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대며, 계속 발포하여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70-100명 이상이 부상하는 일대 참사가 일어났다.
32세의 김구응 선생은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로서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참여해 유관순 열사와 함께 시위 군중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목이 터저라 외치며 일본 헌병에게 적극적으로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이 쏜 흉탄에 맞아 순국했다. 그런데 일본 헌병들은 야만무도하게도 총을 맞고 쓰러진 김구응 열사의 두개골을 총 개머리판과 총검으로 박살냈다.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구응 열사의 어머니 최정철(崔貞徹, 1853-1919세)이 아들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였다. 그러자 헌병은 그 늙은 어머니마저도 창과 칼로 찔러 죽이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3) 시신이 향리의 이목동산에 안장된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짐
아우내장터 사람들은 장터 마당에 처참하게 버려진 김구응(金球應)-최정철(崔貞徹) 모자의 시체를 왜군 몰래 훔쳐내 눈에 안띄는 가전리 이목동산 응달계곡에 묻었다.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쫒겨 김구응 열사 부인과 두 아들까지 행방불명됐고 집과 재산, 서적, 유품 등은 모두 불타 없어졌다.
기미년 3.1만세운동 당시 16세 소녀 유관순이 병천에 내려와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것도, 3.1운동이 지역에 확산된 것도 아우내장터의 진명학교에서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혼을 심어온 김구응 선생의 살신보국정신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일제 관헌은 그 사실을 알고 만세군중을 선두지휘하는 김구응 선생을 시위현장에서 사살했다.
김구응 선생은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시위 현장에서 최초의 희생자가 됐고 가장 핵심적인 주동인물로 활약했지만 활동지역이 시골이었기 때문에 이화학당 선후배 지식인들과 문교부 편수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조카 유제한(柳濟漢 : 1988년 당시 대전시 중구 태평동 거주)을 배경에 둔 유관순 열사처럼 기록을 많이 남기지 못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다.
김구응 의사는 권숙자(權淑子) 여사와 결혼해 슬하에 3남(金泰魯, 金泰東, 金泰夏)을 두었다.
봉분마저 납작하게 주저앉아버린 초라한 묘역엔 애국충절을 기리는 돌비석하나 없었고, 그를 조사연구하는 학자도 없었으며, 그의 넋을 달래려는 후손이나 관계 기관도 없어, 해마다 3.1절이 돌아오면 구천을 떠도는 고혼(孤魂)이 더욱 서글펐었다.
4) 1991년에 건국훈장애족장 추서
아우내장터 4.1독립만세운동의 주역이신 김구응 선생의 공적이 유관순 열사의 그늘에 묻혀 조명돠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1989년 10월 12일 의사 김구응 선생과 자당 최정철 여사 두분의 영혼을 위로하며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숭고한 애국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순국선열 김구응선생 숭모회를 발기했다. 김구응선생 숭모회에서는 김구응 선생을 재조명하고, 해마다 추모제전을 거행하고 있다. 그리고 1989년 12월에는 국가보훈처 천안지청, 천원군, 순국선열 김구응 의사 숭모회(회장 김재홍)가 김구응 의사와 최정철 여사의 묘비를 세우고 제막했다. 묘비문은 김재홍(金在鴻)이 근찬하고, 이종호(李鍾鎬)가 근서했다. 그리고 한국정부가 김구응 선생이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해 1977년에는 대통령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1. 閔丙達?李元杓 편저,『천안독립운동사』, 도서출판 한국문화, 1995.8.28. pp.188-205.
2. 辛相龜, “항일독립운동가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문화원연합회,『제23회 전국 향토문화공모전 수상집』, 계문사, 2008.11.25. pp.345-403.
3. 柳仁錫, “천원 아우내장터 김구응 열사”, 경향신문, 1988.3.1일자. 11면.
4. 정을경, “ 김구응”, 디지털천안문화대전, 2013.
5. 김석모, “유관순 열사, 일본도 가르치는데 한국은 외면”, 대전일보, 2014.10.22일자. 1면.
6.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위키백과, 2014.10.22.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58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더 큰 문제는 유관순 열사를 영웅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유관순 열사를 지도해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끈 독립투사들이 외면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유관순 열사와 함께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유중무, 이백하, 조인원, 김구응 선생은 이제까지 조사연구가 잘 안 되고, 추모사업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그래도 이백하 선생은 향토사학자인 신상구 박사의 희생적인 조사연구와 언론활동으로 최근 신문과 방송에 여러 차례 소개되어 뒤늦게나마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신상구 박사는 2008년 말에 <포암 이백하 선생의 생와 업적>이란 논문을 발표해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리고 이백하 선생이 기초한 <아우내장터 독립선언서>를 발굴해 YTN TV 방송과 KBS 대전방송국 라티오방송에 방영된 바 있으며, 중앙신문(동아일보, 문화일보, 경향신문, 서울일보)과 지방신문(대전일보, 충청일보, 충청투데이, 중도일보, 충청타임즈, 충북일보, 중앙매일, 대전투데이, 충청신문, 충청매일, 중부매일, 충남시사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또한 계간지인『충남예술』과 천안중 교지인 <천웅>에 이백하 선생의 생와와 업적을 소개한 소논문을 게재한 바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 유중무, 조인원, 김구응 선생은 조사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3. 항일독립투사 김구응 선생의 생애와 업적
1) 장명학교와 진명학교 교사로 민족교육 실시
항일독립투사 김구응(金球應) 선생은 1887년 7월 27일 충청남도 천안군 갈전면 가전리 99번지 백전(栢田) 마을의 안동김씨(安東金氏) 문중에서 부 김상목(金相睦)과 모 최정철(崔貞徹)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운 충무공 김시민(金時敏) 장군의 12세 손이다.
그는 5세부터 한학을 수학하는 한편 신학문을 익혔다. 20세부터는 교육을 통해 문맹을 퇴치하는 것이 조국 독립의 첩경이라 인식하고 고향 동리에 청신의숙(靑新義塾)을 개설하고 신학문과 구학문을 직접 가르쳤다. 또한 그는 광복회 유창순(庾昌淳), 김상훈(金相訓) 등과 수시로 협의하여 독립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고 농촌계몽운동에 전념했다.
그 후 28세부터는 수신면 장산리 장명학교(長命學校) 교장인 일인 우에다(植田)) 밑에서 훈도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던 조만형(趙萬衡)과 유관순 열사의 오라버니 유관옥(柳寬玉)을 제자로 가르치면서 항상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31세 때인 1918년부터는 병천면 병천리에서 미국인 구세실 신부가 경영하는 진명학교(進明學校)에서 훈도생활을 하다가 이듬 해인 1919년 4월 1일에 아우내장터 독립운동의 주역이 되었다.
2) 병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주재소 앞에서 총살당함
3.1독립만세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자 홍일선(洪鎰善)이 만세운동을 발의하였으며 김교선(金敎善)이 주도하여 만세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29일 한동규(韓東奎)와 이순구(李旬求)에게 그 취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얻었으며 한동규는 이백하(李栢夏)에게 함께 참여하도록 권유하여 찬동을 얻었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을 목격한 유관순은 3월 13일 귀향하여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조인원(趙仁元) 그리고 숙부 유중무(柳重武)에게 서울의 상황을 전하자 이들은 4월 1일 병천 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3월 31일 밤 자정에 병천 시장을 중심으로 천안 길목과 수신면 산마루 및 진천 고개마루에 거사를 알리는 봉화횃불을 올렸다. 야간을 이용해 예배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였고, 천안쪽 길목은 조병호(趙炳鎬)가, 수신면 쪽은 조만형(趙萬衡)이, 충북 진천 쪽은 박봉래(朴鳳來)가 맡아 만세를 권유하기로 하였다.
4월 1일이 되자 각지에 통하는 도로를 책임분담하고 태극기를 나누어 주었다. 홍일선과 김교선 등은 병천시장에 나가 만세시위의 참여를 권유하였다. 그리고 헌병주재소로 통하는 전화선을 절단하고 시위집회를 거행하였다. 오후 1시경 조인원이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세우고 포함 이백하 선생이 기초한 구국동지회 명의의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3천여명의 시위군중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니, 아우내 장터는 만세소리로 가득찼다. 시위군중이 계속 독립만세를 부르며 태극기를 흔들고 일본 헌병주재소로 접근 하자, 시위군중의 기세에 놀란 일본 군경들이 주재소에서 기총을 난사하고, 또 천안에서 불러들인 헌병과 수비대까지 가세되어 무자비하게 총검을 휘둘러대며, 계속 발포하여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柳重權)등 19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70-100명 이상이 부상하는 일대 참사가 일어났다.
32세의 김구응 선생은 성공회 병천교회에서 운영하던 진명학교 교사로서 지역 유지들과 젊은 청년, 학생들과 함께 참여해 유관순 열사와 함께 시위 군중의 선두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목이 터저라 외치며 일본 헌병에게 적극적으로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이 쏜 흉탄에 맞아 순국했다. 그런데 일본 헌병들은 야만무도하게도 총을 맞고 쓰러진 김구응 열사의 두개골을 총 개머리판과 총검으로 박살냈다.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듣고 달려온 김구응 열사의 어머니 최정철(崔貞徹, 1853-1919세)이 아들의 시체를 안고 통곡하였다. 그러자 헌병은 그 늙은 어머니마저도 창과 칼로 찔러 죽이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3) 시신이 향리의 이목동산에 안장된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짐
아우내장터 사람들은 장터 마당에 처참하게 버려진 김구응(金球應)-최정철(崔貞徹) 모자의 시체를 왜군 몰래 훔쳐내 눈에 안띄는 가전리 이목동산 응달계곡에 묻었다. 일제의 잔혹한 탄압에 쫒겨 김구응 열사 부인과 두 아들까지 행방불명됐고 집과 재산, 서적, 유품 등은 모두 불타 없어졌다.
기미년 3.1만세운동 당시 16세 소녀 유관순이 병천에 내려와 만세운동에 앞장섰던 것도, 3.1운동이 지역에 확산된 것도 아우내장터의 진명학교에서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혼을 심어온 김구응 선생의 살신보국정신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일제 관헌은 그 사실을 알고 만세군중을 선두지휘하는 김구응 선생을 시위현장에서 사살했다.
김구응 선생은 아우내장터 항일독립만세시위 현장에서 최초의 희생자가 됐고 가장 핵심적인 주동인물로 활약했지만 활동지역이 시골이었기 때문에 이화학당 선후배 지식인들과 문교부 편수관으로 재직하고 있던 조카 유제한(柳濟漢 : 1988년 당시 대전시 중구 태평동 거주)을 배경에 둔 유관순 열사처럼 기록을 많이 남기지 못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다.
김구응 의사는 권숙자(權淑子) 여사와 결혼해 슬하에 3남(金泰魯, 金泰東, 金泰夏)을 두었다.
봉분마저 납작하게 주저앉아버린 초라한 묘역엔 애국충절을 기리는 돌비석하나 없었고, 그를 조사연구하는 학자도 없었으며, 그의 넋을 달래려는 후손이나 관계 기관도 없어, 해마다 3.1절이 돌아오면 구천을 떠도는 고혼(孤魂)이 더욱 서글펐었다.
4) 1991년에 건국훈장애족장 추서
아우내장터 4.1독립만세운동의 주역이신 김구응 선생의 공적이 유관순 열사의 그늘에 묻혀 조명돠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1989년 10월 12일 의사 김구응 선생과 자당 최정철 여사 두분의 영혼을 위로하며 독립운동사에 길이 빛날 숭고한 애국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순국선열 김구응선생 숭모회를 발기했다. 김구응선생 숭모회에서는 김구응 선생을 재조명하고, 해마다 추모제전을 거행하고 있다. 그리고 1989년 12월에는 국가보훈처 천안지청, 천원군, 순국선열 김구응 의사 숭모회(회장 김재홍)가 김구응 의사와 최정철 여사의 묘비를 세우고 제막했다. 묘비문은 김재홍(金在鴻)이 근찬하고, 이종호(李鍾鎬)가 근서했다. 그리고 한국정부가 김구응 선생이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해 1977년에는 대통령표창을, 1991년에는 건국훈장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1. 閔丙達?李元杓 편저,『천안독립운동사』, 도서출판 한국문화, 1995.8.28. pp.188-205.
2. 辛相龜, “항일독립운동가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문화원연합회,『제23회 전국 향토문화공모전 수상집』, 계문사, 2008.11.25. pp.345-403.
3. 柳仁錫, “천원 아우내장터 김구응 열사”, 경향신문, 1988.3.1일자. 11면.
4. 정을경, “ 김구응”, 디지털천안문화대전, 2013.
5. 김석모, “유관순 열사, 일본도 가르치는데 한국은 외면”, 대전일보, 2014.10.22일자. 1면.
6. “아우내장터 만세운동”, 위키백과, 2014.10.22.
<필자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생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아우내 단오축제』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등 58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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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4.19혁명 65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기념행사
2025.04.23,
조회 7016
[역사공부방]
신상구
<특별기고> 4.19혁명 65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기념행사 1. 4.19혁명 65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평가 &...
5050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소식
2025.04.22,
조회 5821
[역사공부방]
신상구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소식이 전해진 이튿날, 서울 중구 명동성당으로 추모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신자들은 성당 곳곳에서 묵주를 손에 든 채 기도하거나 눈물을 훔쳤다.22일 명동성당 대성전에는 무릎을 꿇고...
5049
막스 플랑크 물리학 연구소
2025.04.22,
조회 6264
[역사공부방]
신상구
구소최근 수정 시각: 2025-04-18 18:58:38막스 플랑크 물리학 연구소1편집 요청토론역사분류막스 플랑크 협회물리연구소Max Planck Institut für Physik막스 플랑크 물리학 연구소설립1917년 10월 1일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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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11주기, 전국 추모행렬…&quot;더 관심 가져야&quot; 장유하 기자, 서지윤 기자
2025.04.17,
조회 5653
[역사공부방]
신상구
지나가던 시민들은 발길을 멈추고, 노란 리본에 하나둘 쪽지를 붙였다. 쪽지에는 '11년 전 약속 잊지 않겠습니다', '여전히 기억하고 있어요' 등 참사를 기리는 메시지가 담겼다. 기억공간 입구에 마련된 조화를 들...
5047
1927년 “조선은 야만인”에 맞선 청주고의 동맹휴학
2025.04.14,
조회 5914
[역사공부방]
신상구
청주중학교와 청주고등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두 학교는 교정과 청주실내체육관에서 잇따라 기념행사를 열고 있다.청주중과 청주고는 일제강점기인 1924년 4월 19일, 설립을 인가받아 5년제 10학급을 편성했...
5046
충북민속문화연구 분야의 대부 김영진 민속학자의 학문성과
2025.04.13,
조회 6492
[역사공부방]
신상구
“선생님 중요 업적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 안타깝다”기자명김정애 기자입력 2017.07.24 20:47댓글 0공유인쇄본문 글씨 키우기본문 글씨 줄이기故 김영진(金榮振) / 민속학자충북민속문화연구 분야의 대부방언연구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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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 500년 역사’찾아낸 이형구 선문대 교수
[1]
2025.04.13,
조회 6112
[역사공부방]
신상구
‘한성백제 500년 역사’찾아낸 이형구 2001년 어느 날이었다. 기자가 어느 고고학자를 취재하다가 “이형구 교수는 이렇게 생각하던데…”하고 묻자 그 교수는 한마디 툭 던졌다. “이형구 교수가 누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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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수립 제106주년을 경축하며
2025.04.12,
조회 6112
[역사공부방]
신상구
<특별기고&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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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수립 제106주년을 경축하며
2025.04.12,
조회 6049
[역사공부방]
신상구
<특별기고>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수립 제106주년을 경축하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대산 신상구1.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 수립 제106주년의 역사적 의의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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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서해수호의 날 10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기념행사
2025.03.30,
조회 5870
[역사공부방]
신상구
<특별기고>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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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수호의 날 10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기념행사
2025.03.28,
조회 5710
[역사공부방]
신상구
<특별기고> 서해수호의 날 10주년의 역사적 의의와 기념행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시인, 문학평론가, 칼럼니스트, 향토...
5040
울산천부경연구원
2025.03.27,
조회 7040
[역사공부방]
신상구
협력단체(사)천부경연구원참한역사신문 21-01-06 18:28 (사)천부경연구원 안녕하십니까? 사단법인 천부경 연구원 이사장 최동원입니다. 우리의 국조이신 단군님께서 말씀하시...
5039
안동 천년고찰 고운사 전소
2025.03.27,
조회 5874
[역사공부방]
신상구
산불로 전소된 ‘천년사찰’ 고운사···신도들 “허망하고 참담” 눈물입력 : 2025.03.26 13:40 수정 : 2025.03.26 17:11경향신문,이삭 기자뉴스플리공유하기글자크기 변경인쇄하기의성에서 발생한 대형산불이 닷새...
5038
의성군 산불 상황에 대해
2025.03.26,
조회 11046
[자유게시글]
dud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발생한 산불이 닷새째 이어지며 피해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확인된 사망자는 18명에 이르며, 강풍으로 인해 불길이 안동, 청송, 영양, 영덕 등 인근 지역으로 빠르게 번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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