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황당은 어디에서 유래했을까?

2020.01.17 18:03 | 조회 80

서낭당과 성황당城隍堂 같은 말인가?

 

서낭당 신앙은 신교에서 유래​ 

우리나라에서는 본래 서낭당 신앙이 매우 성행하였는데 민중들과 매우 가까워서 서낭당이 없는 마을이 없을 정도였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마을의 어귀나 고갯마루에 놓여진 돌무더기나 오색 헝겊이 치장된 신목神木 등을 통해 서낭당 신앙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서낭당이라는 말은 어디서 유래하였을까? 서낭당은 천왕(天王 : 단군)이나 서낭西郞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주로 한국에서 내려온 서낭당과 중국에서 사용돼온 성황당城隍堂이라는 말은 같은 말이며 같은 유래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결론부터 말하자면 서낭당과 성황당은 같은 말이며 같은 유래라고 생각한다. 서낭당과 성황당은 동아시아문명의 공통 발원지인 발해 연안에서 처음 발생하여 한국으로 들어와 마을신앙을 이룬 것이 서낭당이고, 중국으로 건너가서 마을신앙을 이룬 것이 성황당城隍堂인 것이다. 서낭당과 성황당 신앙의 원형은 신교神敎에서 찾아야 한다.

 

이 서낭당 신앙은 고아시아 시기에 이미 널리 전파되었는데 몽고와 티벳, 시베리아로 전해져서는 ‘오보(鄂博)’가 되었고 또 중국 서북부나 인도차이나반도의 고아시아 민족들도 이런 문화를 지금까지 간직해오고 있다.

안동대 김명자 교수는 “서낭의 본질이 우리나라 고유의 산신신앙과 그에 선행한 천신天神신앙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마찬가지로 고유 민속에서 서낭신앙의 기원을 찾고 있다.” 라고 지적하였다.

 

성황신은 행정구역을 다스리는 신 

서낭당(=성황당)은 서낭신(城隍神)을 모시는 신당이다. 서낭신(성황신)은 무엇일까? 서낭신은 조선시대 때는 기지신基址神의 개념으로 쓰였다. 서낭신은 기지신, 곧 행정구역의 관할 지역을 다스리는 신의 개념으로 쓰였던 것이다.


신교神敎라는 한민족의 전통신앙 체계에 의하면 신의 세계의 정점에는 옥황상제玉皇上帝님이 계신다. 옥황상제를 수반으로 하여 우주통치 체제는 내직과 외직으로 나뉘는데, 내직은 천조天朝에 소속된 직책이고 외직은 자연산천을 구획하여 맡아 다스리는 직책이다. 외직 중에는 산신山神과 성황신, 용왕 등이 있는데 산신은 산을 중심으로 한 지역,  성황신은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 용왕은 바다를 맡아 다스린다. 


<조선왕조실록>과 성황신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국가적으로 성황신에 제사를 올린 경우가 종종 있었다. 중종 때 예조에서 올린 글을 보면 성황제의 절차와 관련하여 ‘국왕은 감히 성황당 신에게 고합니다.’ 라고 고하고 제사를 올려야 한다는 언급이 나온다. 인조 때는 성황당에 중신(重臣)을 보내어 날씨가 개이기를 빌었다고 하고, 숙종 때는 ‘역질(疫疾)이 치열하게 만연되었기 때문에 중신(重臣)을 보내어 경도(京都)의 산천(山川)과 성황당(城皇堂)에 제사지내게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를 보면 임금은 성황제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관리를 보내 국가적인 차원에서도 제례를 거행했음을 알 수 있다.

 

<태종실록>에는 "백악白嶽의 성황신(城隍神)에게 녹(祿)을 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는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개경 송악의 성황신에게 주던 녹을 백악의 성황신에게 옮겼다는 기록이라 하겠다.

이 경우의 백악의 성황신은 도읍을 관할하는 국신國神급의 신이다. 또 태종 때에는 "원단(圓壇)·적전(籍田)·사직(社稷)·산천단(山川壇)·성황당(城隍堂)의 단장(壇場)과 난원(欄園) 을 수리하게 하고, 인하여 수호(守護)하는 인정(人丁)을 차등 있게 주었다." 는 기록이 나오는데 성황제는 말석이나마 국가적 제사의 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종실록>에는 "전주(全州)의 성황위판(城隍位版)에 ‘전주부 성황지신(全州府城隍之神)’이라 적고, 영흥(永興)의 성황 위판에 ‘성황 계국백지신(城隍啓國伯之神)’이라 쓰고, 남녀의 목상(木像)을 설치한 것이 모두 6위입니다. 함흥(咸興)의 성황사묘(城隍祀廟)는 3간(間)입니다." 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세종은 조선의 발상지와 관련한 지역의 성황제를 챙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충청도 옥천, 경상도 안동, 영천, 상주, 진주, 평안도 안주 등의 성황당 위치와 관련한 기록들이 나온다. 오늘날의 시군구 지역마다 
관할 성황당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마을 단위마다 있었던 서낭당

성황신은 국신國神급, 시군구 급도 있는데 반해, 그 하위 행정구역인 면面, 리里급의 성황신도 있다. 현실 행정구역이 도, 시, 군, 면, 리 순서로 구성돼 있다면, 신도神道세계의 행정구역 체계도 대개 그와 비슷하다.

행정구역에 있어서 가장 하급단위가 마을(里)이라면 그 마을마다 서낭당이 있었던 것이다.  

 

시군구 행정지사가 지역을 통치하는 행정업무를 보듯이, 서낭신도 맡아서 처리해야 할 신도적 행정업무가 있다.

서낭신은 격무를 처리하고 나면 때로 배가 고프기도 하다. 그러면 예전에는 이를 알고 그 지역에서 제를 올려 그 노고에 답례하곤 하였다.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제를 올려주지 않으면 실제로 서낭신은 마을에 재앙을 내리기도 하였다.  


<오색 헝겊을 매다는 것은 오방신을 기리는 행위이다...>​​ <사진출처 : 김영아블로그 http://blog.daum.net/a208761/10193>


<산신과 서낭신을 모셔온 전통적인 당집의 형태...>


<서낭신과 산신을 모셔온 당집 신앙의 유래는 신교神敎에서 찾아야 한다...>

 

서낭신과 산신의 관계 

서낭신과 산신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 서낭신과 산신은 누구나 원한다고 자리를 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낭신과 산신은 옥황상제로부터 그 권한을 부여받은 임직으로서 서낭신은 지역을, 산신은 그 주변의 산의 통치를 맡는다. 이 통치구획은 본래 그 구분이 엄격했지만, 인류의 여름철 말기에 이르러 신도통치 체제가 해이해지면서 통치구획의 구분도 점차 문란해졌다. 서낭신과 산신은 마을의 당제堂祭 때 본래 협조관계였지만 20세기 중반기를 지나면서부터 마을에 큰산이 있으면 산신이 우세를 점하고, 야산밖에 없으면 서낭신이 우세를 점하여 제사음식을 서로 다퉜다.


이러한 성황제에는 나라나 마을의 안녕을 비는 정기적인 제사가 있었고, 가뭄이나 재앙이 있을 때는 비정기적인 치성이 올려지기도 하였다. 서낭제나 당제堂祭 등 부락공동제는 주로 정월 보름경에 모셔졌다. 성황제나 당제는 지역의 특성에 따라 신위가 추가되기도 하였다. <구약성서>를 읽어보면 야훼신이 번제燔祭를 받고 기뻐하며 냠냠짭짭 소리를 내며 드시듯이, 서낭신도 제상祭床이 올라오면 그것을 즐거이 흠향하신다. 강태공(姜太公)의 부인 마씨(馬氏)가 성황신이 되었다는 설화는 그 지역신이 되었다는 뜻으로 보면 된다.

 

성황제의 유래와 형태 

서낭제는 마을마다 지낸 형태가 달랐다. 서낭당, 곧 당집에서 지내는 경우도 있고, 오색 헝겊을 달아놓은 신목神木과 돌무더기가 복합된 돌서낭에서도 지내졌다. 당집에서 지내는 것이 원형을 담은 일반적인 형태의 서낭제였다. 본래 소도(蘇塗)에서 유래한 당집에는 환웅이나 단군, 서낭신, 산신 등이 국가적 차원에서 모셔졌지만 신라 법흥왕 때 이차돈이 순교하면서부터 그곳은 석가모니가 꿰찼다. 불교와 국가권력의 결합에 밀린 전통의 당집 신앙은 이후 민간으로 스며들었고 서낭신과 산신, 용왕 등을 모시는소략한 마을신앙으로 자리잡았다.

 

서낭당에 보이는 오색 헝겊을 매단 신목과 돌무더기 신앙은 그 원형이 신교의 신단수神檀樹이며 성산聖山 신앙이다. 신단수는 환웅이 3천무리를 이끌고 내려온 곳이다. 신단수를 상징하는 신목에 오색 헝겊을 매단 것은 옥황상제를 보좌하는 오방신五方神을 기리는 행위이다. 상제上帝 신앙과 오방신 신앙은 중국 도교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라 그 원형을 신교神敎에서 찾아야 한다.  또 원추형 돌무더기에 돌을 던지는 돌무더기 신앙은, 우리 민족이 태초에 알타이산이나 천산天山 등에서 살았던 것을 기념하는 성산 숭배 행위의 일종이다. 돌무더기 신앙은 그 원형은 성산 숭배에 있지만, 마을을 지나가던 길손이 고시레하듯이 돌을 던지거나 올려 쌓으며 개인의 소망과 마을의 안녕을 비는 신양 형태가 후대에 추가되었다.

 

서낭신의 역습 

서낭제는 근대에 이르러 원시신앙(原始信仰)의 대상으로 취급되어 관심의 대상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 하지만 현대인의 관심에서 다소 멀어졌다고 해서 서낭신이나 산신이 어디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다만 시대의 흐름에 밀려 의기소침해 있을 뿐이다. 1970년대에 과학계는 인류의 모든 질병을 완전 퇴치할 수 있다고 선언했지만 그러나 과학자들이 호언장담하는 그 순간부터 질병의 역습이 시작되었다. 자연의 원리는 극즉반極卽反일 뿐이다. 유물주의가 기승을 부린 뒤에는 반드시 비유물주의가 엄습한다. 따라서 우리가 현대과학 문명의 한복판에 살고 있는 듯하지만 서낭신들의 역습도 이미 시작되었다고 봐야 한다. 역사의 진행은 정반합正反合으로 전개되지 않겠는가.

 

<중국 서안에 있는 성황묘 : 중국에 가면 모든 것이 크다. 중국 성황묘의 규모를 보라. 우리나라의 소박한 서낭당과 비교가 되지 않는가. 우리나라의 소박한 서낭당 양식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의 소박한 양식이 중中에 가까워서 더 훌륭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중국의 대국주의 문화와 일본의 축소지향문화의 중감 지점에 있는 한국의 중中의 문화. 소박하고 담백하며, 물과 공기와 같은 비유비무의 양식을 연출해온 한韓 문화. 한국인들 중에는 이 중과 가까운 한韓문화의 가치를 아는 이는 적다. 증산도는 물과 공기와 같은 무위이화無爲而化의 한문화를 통해 21세기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주인공이 되고자 한다...>


<성황묘의 주신主神, 성황신이다...>


<성모전의 여신이다...>


<필자는 중국 서안에 있는 성황묘를 둘러보면서, 우리나라 서낭신과 중국 성황신의 관계에 대하여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성황묘를 지키는 역사力士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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