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화 르네상스 300년 주기설을 아십니까
2024.10.26 10:28 |
조회 6865
한국 문화 르네상스 300년 주기설을 아십니까
때론 가까운 곳에 명소가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고 산다. 지난주 방문한 수원 화성이 그랬다. 화성행궁 옆 에어비앤비에 묵게 된 나는 모처럼 수원 화성의 위용을 코앞에서 확인하고 청량한 기운에 흔들리는 갈대숲의 풍광과 성곽 위로 펼쳐지는 불꽃놀이를 즐기며 가을 정취에 흠뻑 빠져들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러 외국을 가면서도 정작 바로 옆의 유네스코 문화유산을 이제야 제대로 보다니, 부끄럽기까지 했다.
한때 주택을 허물지 않고 구조를 살려 개조한 숙박 시설은 어느 관광객이 와도 불편함이 없는 시설과 센스 있는 인테리어로 시스템 운영되고 있었다. 요즘 명소로 떠오른 행궁동 주변은 서울 익선동과 북촌, 가로수길과 경리단길과 한옥 마을을 버무려놓은 인상이다. 역사와 함께 볼거리 먹거리 즐길 거리가 넘쳐 젊고 늙은 이들을 불러 모으는, 그야말로 ‘문화 융성’의 현장이다.
행궁(行宮)이란 왕이 지방에서 임시 거처하는 궁으로, 화성행궁은 정조의 비전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향한 효심으로 유명한 곳이다. 수원 화성이 있는 팔달구 남창동의 거리명 주소는 정조로와 행궁로 등. 아무리 권세가라도 30년이면 잊히는 세태에 정조라는 이름은 18세기 문예부흥기의 유산과 함께 300년을 가고 있다.
그보다 300년 앞선 15세기 역시 괄목할 만한 문화 중흥의 세기였다. 그때 세종대왕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글’이라는 훈민정음을 창제해 국민의 입과 귀를 열어주었고, 농사짓는 백성을 위해 측우기와 천체 관측 기구를 제작했다. 서양보다 앞서 음악을 기록한 정간보를 창안했고, 관현악 곡을 작곡해 문화를 고양했다. 세종대왕 역시 광화문광장의 한가운데 동상으로, 매일 만지는 만원권의 초상으로 우리 옆에서 600년을 살고 있다.
그때부터 300년이 흐른 21세기 현재, 왜소하고 추한 정치에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문화 중흥기를 맞고 있는 대한민국을 발견한다. 소설가 한강이 아시아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리스트가 환생한 것 같다는 피아니스트 임윤찬은 쇼팽의 음반으로 그라모폰상을 받았다. 봉준호 감독과 배우 윤여정은 오스카상을, 박찬욱 감독은 칸영화제 감독상을,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은 비영어권 첫 에미상을 받았다. 사실 그런 수상 소식은 이제 별로 새롭지도 않다. 이른바 ‘K컬처’가 세계로 뻗어나가며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인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오랜 장기인 춤과 노래는 우리 아이돌에게 전 세계 팬이 열광하게 만들고, 영화와 드라마는 창의적 상상력으로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수출한 웹툰은 우리가 이른바 원조이자 플랫폼이다. 그 밑에는 우리 문화의 축적된 근육이 있다. 15세기에는 한글 창제로 문화적 반석을 다지고 18세기 영·정조 때 문예를 부흥시킨 데 이어 21세기 다시 한국 문화의 중흥을 예감한다는, 이른바 ‘한국 문예부흥의 300년 주기설’이 일리 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사실 이 개념은 한국미래학회 회장을 지낸 최정호 연세대 명예교수가 지난 1997년 새 대통령에게 띄우는 공개 서한에서 제시한 것이다. ‘21세기 한국 문화의 중흥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공개 서한에서 최 교수는 다가오는 21세기를 문화의 세기로 전망하고, 민족사에서 한국 문화의 제3 르네상스가 될 기대를 이야기하고 있다. 아울러 “군주의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만사가 뒤틀리고 인심이 순하지 못하여 악기(惡氣)가 올 것”이라는, 조선 중기 문신 이언적의 일강십목소(一綱十目疏)를 인용하며, 밀레니엄을 열 새 대통령에게 새 천 년을 이끌 ‘심지(心志)’와 ‘심술(心術)’을 주문하고 있다.
한 나라의 문화적 중흥을 이끌기 위해 충족해야 하는 전제가 있는데,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이 그것이다. 정치권력은 도덕적이어야 하고, 경제는 풍요롭고 안정적이어야 한다. 경제 정책과 문화 정책은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세종은 중농 정책을 통해 보여주었다고 최 교수는 역설한다. 문화와 경제의 시너지는 사실 이미 증명이 끝난 명제라고 할 수 있다. 위 설명에 따르면 지금 우리가 구가하는 문화 중흥은 격동 속에서도 민주화를 향해 꾸준히 발전해 온 우리의 정치와, 눈부신 산업화와 정보화로 이룬 경제적 성공에 힘입은 것이다.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토끼가 가져다준 문화 부흥인 것이다. 국가 간 경제 발전 차이를 연구한 공으로 올해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아제모을루 MIT 교수도 한국을 바람직한 제도에 기반해 세계 역사상 가장 놀라운 경제적 성공을 이룬 나라로 확인해 주지 않았나.
아제모을루 교수가 잘 모르는 게 하나 있다. 21세기 문화 중흥 토대를 마련한 사람은 주로 예전 지도자이며, 근래 정치인은 국민의 평균에도 못 미치는 도덕적 기준과 상실을 지닌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애국심과 비전, 도덕성과 공적 의식, 자기희생과 염치, 그 어느 것 하나에서도 옛 지도자들에게 못 미치는 깜냥의 사람들이 요즘 정치인의 평균이다. ‘정치꾼’은 자신의 선거를, ‘정치가’는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는데, 요즘 정치인들은 전자에 가깝다. 그래서 다시 그에게 질문하고 싶어졌다. 그의 연구에서 지도자 요인은 통제된 변인이었는지, 모자라는 정치인들이 계속 집권해도 문화 강국으로 이어갈 수 있을지 말이다.
세상 곳곳이 전쟁으로 어지러운 이 즈음, 300년 만에 찾아온 문화 르네상스를 축복처럼 누리면서도 정치 쪽을 바라보면 그 축복이 얼마나 지속될지 불안해진다. 어느 자리에서 누군가 말했다. “우리나라는 정치만 바뀌면 돼.” 나도 동감이다.
<참고문헌>
1. 박성희, "한국 문화 르네상스 300년 주기설을 아십니까", 조선일보, 2024.10.25일자. A28면.
전체 5,456건 (72/364페이지)
4391
[도전 영어성구] 인간론(1) 천지에서 사람을 쓰는 이 때에
2022.11.11,
조회 10018
[오늘의영어성구]
한곰
The Era When Heaven and Earth ConsummateTheir Purpose Through Humans천지에서 사람을 쓰는 이 때에
1 One day, Sangjenim recited to Hyeong-ryeol:하루는 형렬에게 일러 말씀하시니 이러하니라.2...
4390
이미 흉물로 전락한 한암당, 재개발 서둘러야
2022.11.08,
조회 12204
[역사공부방]
신상구
&nbs...
4389
[도전 영어성구] 처세(53) 밥티 하나라도 조심하라
2022.11.08,
조회 9035
[오늘의영어성구]
한곰
Be Mindful of Even a Single Grain of Rice밥티 하나라도 조심하라
1 On the evening of October 5, Taemonim went into the kitchen and examined a bucket of dirty water by stirring it with her hand.1...
4388
<위로의 책>
2022.11.07,
조회 7915
[좋은글]
온누리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분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길 바라며. 저자 매트 헤이그 <위로의 책> 내용 중 몇 구절을 소개합니다. #태어난 순간부터 나 자신을 아기라고 생각해보자. 우리는...
4387
‘국어사전 독립선언’ 낸 박일환
2022.11.05,
조회 11512
[역사공부방]
신상구
‘국어사전 독립선언’ 낸 박일환 표준국어대사전 어휘 분석해 ‘국어사전 독립선언’ 낸 박일환  ...
4386
[도전 영어성구] 처세(52) 덕은 음덕이 크니라
2022.11.04,
조회 9975
[오늘의영어성구]
한곰
Among the Virtues, Selfless Virtue Is the Greatest덕은 음덕이 크니라
1 “Even if you have extended a benevolent deed to another, it cannot be deemed a virtue if you expect something in return,다...
4385
‘조선 망국 논란’보다 중요한 것
2022.11.04,
조회 12583
[역사공부방]
신상구
‘조선 망국 논란’보다 중요한 것URL 복사 이웃추가 본문 기타 기능 나라 구실 못 한 조선, 그렇다고 日의 강제 병탄이 정당화되진 않아 고종, 만민공동회의 개혁...
4384
산내 골령골의 죽음을 기억하며
2022.11.01,
조회 12452
[역사공부방]
신상구
산내 골령골의 죽음을 기억하며오피니언사외칼럼세평입력 2022.06.29 07:00지면 18면기자명김화선 배재대 주시경교양대학 교수 이전 기사보기 다음 기사보기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
4383
<나는 인생의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바꿔보기로 했다>
2022.11.01,
조회 7985
[좋은글]
온누리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만의 시기에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저자 개리 비숍, 그의 <나는 인생의 아주 기본적인 것부터 바꿔보기로 했다> 책 내용중 몇 구절을 소개합니다.당신이 지금 비...
4382
고우 홍기삼의 생애와 업적
2022.10.29,
조회 11811
[역사공부방]
신상구
&nbs...
4381
[도전 영어성구] 처세(51) 우리 공부는 용(用)공부니라
2022.10.27,
조회 10589
[오늘의영어성구]
한곰
Our Practice Is an Applied Practice우리 공부는 용 공부니라
1 “Our practice is an applied practice, so completely devote yourself to the practice that is unknown to others.우리 공부는 용(用)공부...
4380
[도전 영어성구] 처세(50) 묻기만 하면 네 일은 언제 하려느냐
2022.10.24,
조회 9652
[오늘의영어성구]
한곰
If You Ask Others About Every Matter, When Will You Do Your Own Work?묻기만 하면 네 일은 언제 하려느냐
1 The disciples were required to attain an understanding of the meaning of Taemonim’s word...
4379
공자의 비밀코드 2400년 만에 푼 논산人 일부 김항
2022.10.22,
조회 14851
[역사공부방]
신상구
공자의 비밀코드 2400년 만에 푼 논산人 일부 김항“정역(正易)은 주역에 숨겨진 진리 밝힌 책”주역(周易)은 천지인(天地人)의 도를 밝힌 ‘완전한 책’일지 몰라도 그 의미를 완전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공자...
4378
2024년에 개교 100년을 맞이하는 청주고 변천사
2022.10.21,
조회 13510
[역사공부방]
신상구
2024년에 개교 100년을 맞이하는 청주고 변천사 청주시청 근처인 영동에 5년제 청주 제1고보...
4377
[도전 영어성구] 처세(49) 열 항목의 계율을 내려 주심
2022.10.21,
조회 9913
[오늘의영어성구]
한곰
Taemonim Confers Ten Precepts열 항목의 계율을 내려 주심
1 One day in May, Taemonim summoned and gathered senior practitioners and then conferred upon them ten precepts:5월에 하루는 태모님께서 간...








댓글 0
댓글 내용을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