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의 별 김지미 미국서 투병하다 향년 85세로 별세.

2025.12.10 21:42 | 조회 1664


                     한국 영화의 별 김지미 미국서 투병하다 향년 85세로 별세.

 

  1960~1970년대 한국 영화의 최고 스타였던 배우 김지미(본명 김명자)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85. 한국영화인총연합회는 10일 “김지미 배우가 한국시각 지난 7일 오전 4시30분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심장 질환으로 투병해온 고인의 직접적 사인은 저혈압으로 인한 쇼크인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은 1957년 김기영 감독의 ‘황혼열차’로 데뷔한 뒤 숱한 히트작에 출연했다. 1980년대에는 제작사를 설립해 임권택 감독과 ‘티켓’ ‘길소뜸’ 같은 수작들을 함께 만들며 여성 영화인으로서 큰 족적을 남겼다.

  1940년 충남에서 태어난 김지미는 아버지가 서울에서 사업으로 큰 성공을 이룬 덕에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학 준비를 하던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만난 김기영 감독의 간곡한 제안으로 ‘황혼열차’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첫발을 디뎠다.

  김지미가 고아원 교사로 출연한 이 영화는 당시 아역 배우 안성기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이듬해 김기영 감독과 ‘초설’ 등을 찍으며 본격적으로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한 김지미는 1958년 ‘별아 내 가슴에’와 1959년 ‘청춘극장’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스타 반열에 올랐다. 두 작품에서 만난 홍성기 감독은 김지미의 첫 남편이기도 했다.

  김지미는 다른 인기 여성 배우들보다 도회적이고 화려한 이미지로 새로운 시대의 스타로 발돋움하며 1960년대 한국 영화의 황금기를 일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최은희, 조미령, 엄앵란 등 1세대 인기 여성 배우들에 이어 1960년대 윤정희, 문희, 남정임 등 여성 배우 트로이카 시대, 1970년대 유지인, 장미희, 정윤희 등 새로운 스타 여성 배우들이 등장할 때까지 세대를 뛰어넘어 전성기를 이어간 유일한 여성 배우였다.

  1961년에는 당시 최고 스타 콤비였던 신상옥 감독, 배우 최은희 커플이 만드는 ‘춘향전’에 맞서 홍성기 감독의 ‘춘향전’에 주인공으로 출연했고, 1965년 작 ‘불나비’(조해원 감독)에서는 한국 영화에 없던 팜파탈 역을 소화하면서 새로운 여성 캐릭터의 영역을 개척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스타에서 실력파 연기자로 보폭을 넓혀갔다. 김수용 감독의 ‘토지’로 파나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과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1975년에는 김기영 감독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육체의 약속’에서 사형수의 미묘하고 불안한 욕망을 탁월하게 연기하며 또 한번 대종상을 수상했다.

  김수용 감독은 김지미에 대해 “연기 주문을 했을 때 원하는 수위 이상의 과도한 감정을 펼치는 배우들이 있는데, 그는 항상 딱 알맞은 정도로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줬다”며 “아주 영리한 배우”라고 평가했다.

  1984년 임권택 감독과 찍은 ‘비구니’가 불교계의 반발로 제작이 중단되는 시련을 겪었지만, 이를 계기로 임 감독과 다시 손잡고 만든 ‘티켓’(1986), ‘길소뜸’(1986)은 큰 호평을 받았다. 이후에도 이장호 감독의 ‘명자 아끼꼬 쏘냐’(1992) 등으로 1990년대까지 연기 활동을 이어갔다. 겹치기 출연이 다반사였던 1960~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활동해 출연작이 무려 800편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남아있는 작품은 350편 정도다.

  김지미는 빼어난 외모와 연기력뿐 아니라 화려한 스캔들로도 유명했다. 데뷔 이듬해인 1958년 18살 나이에 홍성기 감독과 처음 결혼한 뒤, 유부남이던 스타 배우 최무룡과 스캔들을 일으키면서 간통죄로 구속되기도 했다.

  최무룡과의 결혼은 1969년 끝났고, 1970년대 중반 스타 가수 나훈아와도 염문을 뿌리며 1980년대 초까지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서 그는 거침없는 행보로 ‘여장부’라는 별명을 얻었다. 촬영 현장은 물론, 사회활동, 사생활에서도 거침없는 성격을 드러냈다.

 

  고인은 1980년대 지미필름이라는 영화사를 직접 차려 ‘티켓’ ‘길소뜸’을 직접 제작하는 등 제작자로서도 활발하게 활동했다. 7편의 영화를 제작한 뒤에는 영화 정책과 관련된 활동에도 참여했다. 1995년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1998년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1999년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등을 맡았다. 배우로서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도 맡았던 고 강수연은 “1960~1980년대에는 영화 출연이나 제작 환경이 열악한 상황이었고, 주목받는 배우가 연기 외적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는 것은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힘든 일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한국 영화사에서 김지미 선생님의 존재감은 특별하다”고 생전에 평가했다.

  노년기 들어서는 정치적 발언으로 사회적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2011년 보수 일간지 인터뷰에서 진보 영화인들을 향해 “영화계 물을 흐렸다” “공산당과 뭐가 다른가”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해 구설에 올랐다. 2010년 부산영화제에서 김지미 회고전이 열릴 때는 지나친 의전을 요구했다는 소식이 흘러나오면서 비판을 받았다.

  한국영화인총연합회는 미국 현지에서 이미 화장이 끝났으며 오는 12일 장례 절차도 마무리될 것을 고려해 별도의 영화인장은 치르지 않기로 했다. 대신 추모 공간을 마련해 고인을 기릴 계획이다.<김은영, “시대를 가로지른 한국 영화의 별 김지미 미국서 투병하다 향년 85세로 별세”, 한겨레신문, 2025.12.1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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