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소녀 서예가 김진민 학술대회 이모저모
천재 소녀 서예가 김진민 학술대회 이모저모
몽련(夢蓮) 김진민(金瑱珉)이 21세인 1933년에 쓴 '낙지론' 병풍(사진-정읍시립박물관 변희섭 학예사).
[시사매거진/전북] 일제강점기인 1924년부터 1933년까지 약 10여 년 동안 활동한 후 절필(絶筆)했던 정읍의 천재 소녀 서예가 몽련(夢蓮) 김진민(金瑱珉, 1912~1991)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돌아보는 학술세미나가 지난 23일 정읍시청 5층 대회의실에서 진행됐다.
이날 학술세미나에서는 12세의 어린 소녀 김진민이 1924년의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서예작품을 출품해 최연소로 입선하게 되면서 서예가로서 명성을 얻은 후 1931년까지 발표한 총 16점의 작품 가운데 총 5점이 특선을 차지하였을 만큼 장래가 촉망되던 작가였다는 사실이 공개됐다.
첫 번째 주제발표에 나선 이용엽 국사편찬위원은 「10대에 천재성을 발휘한 여류 서예가 김진민의 재조명」이라는 주제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김진민의 가계와 생애에 관한 발표를 통해 “김진민이 7세에 서당을 다니며 한학을 공부하며 9세에 『맹자(孟子)』 수학하고 현재 국보인 김제 금산사 미륵전의 「대자보전(大慈寶殿)」 현판을 썼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을 발휘했던 서예가”였다고 밝혔다.
아울러 어린 김진민이 어린 나이로 사찰의 현판을 썼던 배경에 대해서도 “당시 정읍 태인의 불심 깊던 그의 선친 가산(迦山) 김수곤(金水坤, 1873~1950)의 영향”으로 금산사와 법주사의 미륵불 조성 당시 대 시주자였을 만큼 불사에 적극적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무남독녀였던 그녀가 일찍부터 불교 현판을 쓰게 되었던 배경을 밝혔다.
학술세미나에 앞서 유진섭 정읍시장이 인삿말을 건네고 있다(사진-정읍시홍보실).
이날 발표에 따르면, 김진민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권유로 9세부터 서예가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에게 서예를 배웠고, 11세에 전남 영광 불갑사의 「불갑사(佛甲寺)」 편액(扁額), 장성 백양사의 「우화루(雨花褸)」 편액, 글씨를 썼을 정도로 어릴 때부터 실력이 빼어났다.
이후 12세이던 1924년에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연소로 입선하면서 서예가로서 이름을 알렸으며, 1931년까지 발표한 총 16점의 작품 중 5점이 특선을 차지할 만큼 장래가 촉망되던 작가였다. 하지만 그녀가 10여 년의 활동 이후 절필한 배경에 관해서는 이렇다 할 이유가 밝혀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진민이 활동하던 일제강점기 1930년대는 이전까지의 뿌리 깊던 서화일체(書畫一體) 사상이 일제의 영향에 따라 기존의 화단(畫壇)에 서화(西畵)가 유입되며 서(書)와 화(畵)가 분리되던 시기로 끝내 1931년 기존의 서예부가 폐지되던 시기와 맞물려 있었다는 점에서 김진민의 절필 배경이 막연히 추론되기도 했다.
당시 김진민이 스승으로 삼았던 서예가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는 일제강점기 치제 속에서도 대단한 위상을 나타내던 작가로 친일 작가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시대를 풍미하던 서체에 심취하며 앞서 그런 서체를 구사하던 인물들의 인물됨이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글씨체만큼은 가져다 원용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김진민은 우리나라에서 기존의 서예부가 폐지되던 1931년까지 총 16점의 작품을 출품한 이후 서예 작품을 일절 내놓지 않았지만, 15세에 송광사 보명학교와 18세 송광사 중등과 지방학림에 입학하여 3년 학과를 졸업한 후 불상 조성을 자세하게 기록함으로써 한국미술사와 불교미술사의 역사가 정리될 수 있었던 사실도 새롭게 밝혀졌다.
두 번째 발표에 나선 전북대 김병기 명예교수는 「몽련 김진민 서예 연원(淵源) 연구」 발표를 통해 김진민의 서예작품 연구를 위해서는 먼저 김진민의 스승인 성당 김돈희의 서법에 관해 집중적인 발표를 이어갔다.
실제로 당시에는 서첩이든 비첩이든 서예의 범본으로 사용하는 법첩의 구입이 매우 어려웠던 시기로 서예 공부에 뜻을 둔 대부분 서예인은 법 첩 대신 스승의 글씨를 본받아 따라쓰는 경우가 많았고, 성당 김돈희와 산곡(山谷) 황정견(黃庭堅, 1045~1105)의 서체가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김진민의 서체도 예외는 아니라는 의견이 피력되기도 했다.
따라서 김진민이 선보인 당시의 전서, 예서, 해서, 행서, 초서 등의 이른바 5체의 경우도 같은 맥락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하지만 이와 관련해 토론에 나선 지암(止庵) 류승훈 서예가는 “몽연 김진민의 서예를 그의 나이 12세 때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연소로 입선한 것을 필두(筆頭)로 보는 것은 정읍의 지역적 정서와는 맞지않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몽연 김진민은 그 이전은 10세 이전부터 이미 지역에서는 명필로 명성이 있어 이 고장의 전설이 되다시피 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우리나라의 전통 속설에서 10세 이전의 아동서(兒童書)는 벽사(辟邪)의 기운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귀히 여겼던 사실을 밝혔다.
몽연 김진민이 12세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나가기 전 1923년 11세 때 정읍 정토사에서 쓴 '칠성각' 현판(사진-지암 류승훈 선생 제공).
특히 “각종 장사하는 싸전, 어물전, 포목전 등에서는 상점 간판을 아동서로 내거는 것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래서 아동서를 구하기 힘들 때는 좌수서(左手書)로 대신하기도 했다”며 “김진민의 입선 전 글씨가 이미 능서가(能書家) 40~50대의 난숙(爛熟)한 글씨를 보는 것과 같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반박 토론문을 통해 스승인 성당 김돈희의 서법 따라하기에 관해서도 “몽연 김진민의 또 다른 편액(扁額)이나 금석문(金石文)에서는 사백(思白)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이나 서성(書聖) 왕희지(王羲之, 321~379)의 서풍(書風)을 더 진하게 풍기고 있다”고 밝혔다.
덧붙여 “격동기에 바르게 의지를 견지한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 1853~1939)나 간재(艮齋) 전우(田愚, 1841~1922)의 문하생이었던 운재(芸齋) 윤제술(尹濟述, 1904~1986) 등 당대의 능서가들도 당대 필획(筆劃)을 구사했던 서풍에 있어서 그 시대를 풍미하는 서체에 심취하여 인물됨은 따를 수 없는 함량 미달이라고 하더라도 글씨체는 가져다 원용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밝혔다.
실제로 중국의 회암(晦庵) 주희(朱熹, 1130~1200년)도 조조의 글씨체를 모본(模本) 삼아 씀으로써 세간의 비판이 있을 때마다 “나는 조조의 글씨만 가져왔지, 조조의 간웅(奸雄)적 인격은 닮지 않는다”고 하였던 사례도 있어, 글씨체를 가져다 쓰던 유풍은 복식(服飾)의 유행과 흡사한 것이었다.
따라서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 하여 “글씨는 바로 그 사람이다”는 사계(斯界)의 정론인데 능서가(能書家)와 인격과 부합한 명서가(明書家)와는 확연히 구별되어야 하나 그 기준점은 모호했다. 이런 점에서 성당 김돈희의 서력(書歷)과 친일 이력은 덮어질 수 없는 결격이라 할 수 있지만, 어린 김진민이 독서당으로 도제(徒弟) 교육을 받아 스승의 필세(筆勢)를 충실히 따른 것은 별개의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한편 이 자리에서는 몽연 김진민 학술세미나를 계기로 소녀명필을 동경하는 어린 후학들이 뒤를 이을 수 있는 학술적 접근 방안이 논의되기도 했다.<이용찬, “천재 소녀 서예가 김진민 학술대회 이모저모”, 시사매거진, 2021.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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