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이름들
잃어버린 이름들
한국은 잃어버린 이름들의 나라이다.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역사는 외세에 시달리며 살아온 사연들로 점철된 한민족의 역사만큼 긴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 주제로 영미 문단에서 주목을 받은 작품을 낸 김은국(Richard E. Kim) 작가는 1960년대 초 출판된 『순교자(The Martyred)』에 뒤이어 『잃어버린 이름들(Lost Names: Scenes from a Korean Boyhood)』을 발표했다. 일제강점시대 소년기의 기억이 주 내용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때 내가 짓궂게 “왜 본인 이름은 리처드인가” 하는 글을 쓴 기억도 있다. 원 이름을 외국 이름으로 아예 바꾸거나 혹은 성은 그대로 쓰면서 이름만 외국 이름을 채택하여 쓰거나 하는 과정은 한 가지 설명이나 한 가지 동기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가장 흔한 설명은, 정치·경제·문화 등 영역에서 힘의 변동에 따라 작명도 바뀐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유럽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사람들의 이름이 성경의 이름을 따라 바뀌는 것이다. 서세동점(西勢東漸)과 함께 아시아에서도 서양 이름을 빌려 새로운 이름을 쓰는 경우도 많아졌다.
월북한 인사들 생각보다 많아
다양한 이유로 북으로 넘어가
잊혀진 분들 이름 찾기를 통해
다시 하나될 계기를 만들어야
이런 예와는 또 다른 환경에서 이름이 잊혀 간 경우도 있다. 이런 분들의 일생과 행적에 관해 여러 생각이 있을 수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이분들의 생애와 함께 이름이 잊히게 된 환경이나 경위도 우리가 한번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유학을 간 영국의 조그마한 도시의 통학 길에 보는 알코올 중독자 노숙인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주말 이 도시의 지역 신문에 그분의 사망기사(obituary)가 나온 것을 보고 놀랐다. 그분의 일생과 행적에 관해 매우 깊이 있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보이는 글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여기서 언급하는 몇 분들은 나의 기억에 남아 있을 뿐 추모 기사는 물론 대부분 많은 사람의 관심에서 사라져버리고 만 것 같다. 먼저 생각이 나는 분이 김해균인데 이분은 큰 지주이면서 또 공산주의자였다. 이분과 우리 집은 담장 하나를 가운데 둔 이웃이었는데 어른들 사이에 세교는 없었지만 그 집 아이들과는 즐겨서 같이 놀기도 했다. 해방 직후 박헌영이 이 집에 자주 머물렀기에 그의 집이 박헌영의 “명륜동 아방궁”이라고 불리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북한 점령 하 서울에서 일정한 역할을 하다가 서울 수복 시에 북으로 갔는데 그 후 소식이 끊겼다. 유일하게 그에 관한 소식을 후일 북한의 박헌영 재판 기록에서 찾았는데 검찰 측의 증인으로 나온 것이었다. 그런데 판사가 “이미 피고가 자신의 잘못을 모두 자백하였기 때문에 증인의 증언이 필요 없다”고 하여 그가 박헌영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또 다른 분은 박세균인데 내가 듣기에는 한국 최초의 영국 케임브리지대 유학생이고 총독부 장학생이었다. 여하간 일제 강점기에 고위직에 있었는데 해방 후에는 박헌영의 측근이 되었다. 이 시기에 유사한 일들이 있었던 것으로 들었다. 종로경찰서장을 하던 손석도는 김준연의 측근이 되었다는 말도 있었다. 박헌영은 박세균이 새로운 국가 건설에 여러모로 쓸모 있으리라 생각한 것인가. 박헌영 월북 시에 그분도 함께 간 것으로 들었다. 그 이후에는 종적이 없이 사라졌다.
내가 개인적으로 제일 마음 아프게 생각하는 분은 유명한 소아과 의사 이성봉인데 계동 골목 입구의 큰 건물이 그의 병원이었다. 어렸을 때 병약했던 나를 잘 돌보아 주던 분인데, 그분도 납북되었고 남겨진 가족들은 갑자기 생계가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사모님이 익숙지도 않은 행상으로 가계를 꾸려가는 것을 보며 어린 마음에도 안타깝게 여기던 기억이 있다. 이외에도 선친과의 관계 때문에 개인적으로 기억하는 분들도 있다. 백관수·정광호 같은 분들인데 저명인사들이어서 잊힌 것은 아니지만, 북한에서의 행적도 제대로 밝혀진 전기가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 두 분 다 우리와 가까운 사이여서 납북된 후에도 가족들과는 관계를 이어갔다. 예외적으로 훌륭한 일들도 있었다. 소설가 박태원의 아들이 북한에까지 가서 어려운 작업을 하여 선친에 관한 좋은 저술을 남겼다. 소설가 이문열도 월북한 부친에 관련된 개인적인 감정과 함께 그의 이복동생을 중국에서 만난 이야기를 펴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매우 귀한 자료들이다.
나이가 들어 대인 접촉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주변에 월북한 인사들이 평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지식인층에 많았다. 한국 전쟁 이전에도 자원해서 북으로 간 분들의 개인적인 환경이나 동기가 평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다양했다. 가깝게 지내는 분 중에도 가족 내에 이런 사연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이분들은 어려움 없이 정상적인 생활을 하며 정부의 중요한 직책에 있으면서도 별다른 지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우리나라 분단의 사연이 그만큼 넓고 깊다는 시사인가? 잊힌 분들의 이름 찾기는 과거의 향수나 인문학적인 관심 때문만이 아니다. 이들의 사연이 바로 같은 민족이 남북으로 갈리게 된 경위와 더불어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는 계기의 밑거름이 되리라고 여기기 때문이다.<라종일, “잃어버린 이름들”, 2026.2.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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