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계 박인노의 생애와 인격
시조시인 노계 박인노의 생애와 인격
노계(盧溪) 박인노(朴仁老, 1561-1642)는 명종 16년인 1561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불우한 10대, 20대를 보낸 듯 하다. 10대에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며 가난에 찌들려 제대로 글공부를 하지 못했다. 자서전적인 「무하옹전」 에서 그는 “무예를 거칠게 익혔고, 시서(詩書)에 매진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회상한다. 노계가 서른두살 되던 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노계는 무부로 거듭나 호수(湖叟) 정세아(鄭世雅) 의병장 휘하에 들어갔다. 노계는 이때 의병으로서의 세운 공로로 원종공신 명단에 든다. 노계는 서른아홉 되던 해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문장과 선전관을 제수 받았고, 1605년에는 통주사가 되어 「선상탄」 을 쓴다. 그는 조라포 만호(萬戶)를 끝으로 20년간의 군무를 마치는데 이때 그는 이미 쉰 두살 이었다.
그는 나이 많았지만 성현을 읽고 따르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었다. 종교인들이 신의 계시를 받듯 그는 꿈에 주공(周公)으로부터 성ㆍ경ㆍ충ㆍ효(誠ㆍ敬ㆍ忠ㆍ孝) 네 글자를 받아 그것의 실천이 곧 도에 이르는 길임을 깨닫는다. 그는 일찍이 노주(蘆洲)(경주시 산내면 대현리)의 자연승경을 사랑하여 그곳에 집을 지어 산 뒤, 도천에 돌아와 오래도록 숨어 지냈다.
노계는 이렇다 할 스승도 제자도 없었고, 시대의 아픔과 고난을 유도(儒道)로 넉넉하게 극복한 고고한 선비였고 또 외로운 가인(歌人)이었다.
노계의 산소는 서원 앞 못둑을 지나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계단으로 올라가면 바로 보인다. 노계의 산소는 묘지 한가운데 있고 그의 아버지 승의부의(承議副扆) 박석(朴碩)의 묘가 바로 위에 있다. 동생 인수(仁叟)의 묘는 왼쪽으로 떨어져 있고 동생 인기(仁耆)의 묘가 바로 아래에 있다. 맨 아래 묘는 인수의 아들 순립(舜立)의 묘다.
노계는 부모가 돌아가신 후 해마다 이곳에 성묘하러 왔으며 그때의 감정을 “어버이 그리는 정 늙을수록 더욱 깊어/하늘이 다하고 땅이 없어야 내 마음 다하리/개오동나무에 이슬과 서리 내리면 더욱 그리워져/해마다 성묘 때면 눈물 글렁이네(永慕情瀤老益深/窮天無地盡吾心/楸原霜露偏增感/省掃年年㴃不禁)”라고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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