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운몽(九雲夢)의 저자 金萬重이 귀양 간 섬 노도 귀양문학관
구운몽(九雲夢)의 저자 金萬重이 귀양 간 섬 노도 귀양문학관
미천한 신분에서 몸을 일으켜 왕비에까지 이르게 되자 나라를 파국으로 몰고 갔던 장희빈(張禧嬪). 그 여인이 일으킨 파장으로 유배를 당해야 했던 송시열(宋時烈)과 김만중(金萬重)을 생각하면 역사는 그렇게 되풀이되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장희빈의 일생을 다루는 사극들은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일까?
필자가 살고 있는 大田 서쪽 솔밭에 김만중(金萬重)의 묘가 있다는 것을 늦게야 알게 되었다.
김만중은 누구인가? 유광수 교수는 ‘우리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작가’라고 했고 ‘구운몽’(九雲夢)을 대표적인 작품으로 내세웠다.
그 유명한 ‘구운몽’을 쓴 김만중의 묘소가 우리 동네 가까이 있었다니 갑자기 호기심이 생겼다.
숙종 임금은 우암 송시열을 제주도로 유배 보내고 김만중은 남해에 있는 외로운 섬 노도로 귀양을 보내는데 여기에 기폭제 역할을 한 여인이 장희빈이다.
숙종의 정실부인이었던 인현왕후는 덕성이 높았지만, 아이를 낳지 못하였고 그의 정치적 배경에는 송시열을 영수로 하는 서인(西人)이 있었다.
말단 나인으로 궁궐에 들어왔던 장희빈은 교태와 미색으로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고 숙종의 아들까지 낳았다. 그러자 숙종은 장희빈에게서 출생한 아들(후에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려고 하였으며, 이에 남인(南人)들이 적극 찬성하였다.
이에 숙종은 장희빈을 왕비로 올리고 그 몸에서 난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으며, 인현왕후는 후궁으로 강등시켜 밖으로 내쫓았다.
그러자 서인의 영수 송시열과 ‘구운몽’ 작가로 존경을 받던 김만중이 반대하고 일어났다. 중전이 아직 젊은데 출산을 못 한다고 후궁으로 강등시키고, 그 자리에 장희빈을 앉히는 것은 부당하니 재고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크게 분노하여 송시열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가 한양(서울)으로 올라오라고 했는데, 전라도 정읍에 이르렀을 때 사약을 내려 죽게 한다. 이렇게 하여 남인들이 세력을 잡고 서인들은 모든 권력에서 남김없이 쫓겨나야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서인들이 정권을 잡자 남인들에게 철퇴가 가해졌고, 요사스런 언행으로 왕의 사랑을 독차지하여 나라를 어지럽혔던 장희빈은 궁중에서 쫓겨나 사약을 받고 죽었다. 서인이 정권을 잡은 것은 물론이다.
필자는 당파 싸움에 왕비가 되기도 하고, 사약을 받고 죽기도 하는 비운 속에 유배 생활을 했던 경상남도 남해의 외딴섬 노도(櫓島)를 찾았다.
인현왕후가 왕비에 오른 것은 겨우 14세 소녀 때였고, 궁중에서 왕에게 교태를 부리며 유혹했던 장희빈은 완숙한 여인.
인현왕후 편에 섰던 김만중은 서인으로 송시열과 뜻을 같이했다. 그는 1689년 2월 임금에게 장희빈의 처신을 문제 삼았다가 평안도 선천으로 유배를 갔고, 숙종은 그를 다시 경상남도 남해의 아주 작은 섬 노도로 보냈다. 작지만 참 아름다운 섬 노도. 주위는 파란 바다. 섬에는 동백나무와 진달래가 숲을 이루고, 이름 모를 새들이 노래한다. 유배 온 선비들이 머물던 방에서 창문을 열만 바다가 파도를 친다. 김만중은 이런 고독에 사무쳐 최초의 한글 소설 ‘구운몽’을 구상하고 또 써 내려 갔으리라. ‘구운몽’ 자체가 불교에서의 ‘空’ 사상, 부귀공평이 한낱 봄날의 꿈임을 표현하는 것이었고, 그렇듯 인생만사를 부정하면서 다시 그 부정에서 긍정을 찾는 것. 그가 ‘空’ 사상을 가슴 깊이 느낀 것은 이곳에서 어머니가 유배지로 아들 김만중을 보러 오다 세상을 떠났을 때의 충격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가슴 아프게 어머니를 그리면서 붓을 들었다.
‘오늘 아침 어머님이 그립다는/말을 쓰려고 하니/글자도 되기 전에 눈물이 흥건하구나/몇 번이나 붓끝을 적셨다가 다시 던져버렸는지…/’
안타까운 것은 김만중 역시 1692년 이곳 노도의 동백나무 숲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어쩌면 이렇게도 여인들의 당파 싸움이 모자의 죽음으로까지 몰아갔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도 귀양살이하던 조그만 집이 오늘도 남아있고, 수없이 스쳐 간 선비들의 피맺힌 글귀가 읽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전국에서 처음으로 일곱 분이나 이곳에서 귀양살이를 한 것을 기념하여 ‘귀양 문학관’이 세워졌는데 이곳엔 그분들이 남긴 글이 전시되어 있다. 그때도 그랬고 오늘도 서인과 남인이 있고 노론과 소론이 있어 싸움은 계속되고 있다. 지워질 수 없는 DNA. 그래서 그 DNA는 10년, 20년 후에도 이어질 것이다. 슬픈 일이다.<변평섭, 시대일보, 2026.3.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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