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독립선언의 주역인 근촌 백관수 선생의 서글픈 사연
2·8독립선언의 주역인 근촌 백관수 선생의 서글픈 사연
근촌 백관수 선생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정국에서 조국의 독립과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민족 진영의 핵심 지도자다. 그러나 그는 해방 이후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흐르도록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서훈을 받지 못하고 역사의 그늘에 머물러 있다.
이러한 홀대의 배경에는 일제 말기 동아일보 경영에 따른 친일 의혹과 납북 이후의 행적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관계를 면밀히 추적해 보면 이러한 우려는 객관적 근거가 없는 기우에 불과하다는 점이 명확히 드러난다. 필자는 역사학자의 양심을 걸고 근촌의 업적을 기리며 그를 둘러싼 오해를 사실에 기반해 소명하고자 한다. 이제는 근촌의 삶을 온전하게 재평가해 국가 보훈의 정의와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할 시점이다.
1. 항일의 선봉과 민족의 자강
근촌은 1919년 일본 도쿄(東京) 유학 중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해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불굴의 선구적 인물이다. 이 거사는 훗날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결정적인 도화선 역할을 하며 독립운동사에 굵은 획을 그었다. 그는 직접 독립선언서의 초안을 수정하고 거사 현장에서 이를 당당히 낭독하며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천명했다. 일본 경찰에 검거된 후에도 그는 일제 사법 체계의 모순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며 투쟁의 끈을 놓지 않았다. 단순한 감성적 저항을 넘어 지성적인 논리로 일제 통치의 부당성을 역설한 점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의 초기 항일 투쟁은 우리 민족이 가야 할 독립의 길을 제시한 상징적인 사건으로 반드시 기억돼야 한다.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근촌은 교육과 경제라는 실질적인 측면에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는 일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는 중앙학교 교사로서 후학을 양성하며 민족의 앞날을 짊어질 인재들을 교육하는 일에 자신의 삶을 헌신했다. 동시에 조선물산장려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우리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꾀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이러한 활동은 무장 투쟁 못지않게 중요한 민족 생존 전략의 일환이었으며 대중의 민족적 자각을 이끌어내는 동력이 됐다. 그는 이념적 갈등에 매몰되지 않고 오직 민족의 실력 배양이라는 실사구시적 관점에서 모든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근촌은 이처럼 다각적인 방식으로 독립의 토대를 닦으며 민족의 내실을 기한 진정한 의미의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1927년 근촌은 좌우 합작의 기치 아래 창립된 신간회에서 중추적인 가교 역할을 수행하며 민족의 대동단결을 구현했다. 그는 신간회 본부의 핵심 간부로서 정파를 초월한 단결을 도모하며 항일 역량을 하나로 결집하는 데 지대한 기여를 했다. 특히 원산 총파업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생했을 때 이를 전국적인 항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배후에서 치밀하게 움직였다. 특정 정파나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오로지 민족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한 그의 지도력은 당시 사회의 큰 신망을 얻었다. 신간회 활동은 그가 단순한 독립운동가를 넘어 민족 통합을 이끌 수 있는 거물급 정치 지도자임을 세상에 입증했다. 그는 이 시기의 투쟁을 통해 우리 민족이 이념의 벽을 넘어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2. 언론 수호와 지조의 궤적
일제 말기 동아일보 사장을 역임한 이력을 두고 제기되는 친일 의혹은 당시 언론 환경의 특수성을 깊이 있게 고려해야 한다. 1930년대 후반 일제는 민족 언론을 말살하기 위해 전방위적인 압박을 가하며 기관지의 친일화를 획책하고 있던 시기였다. 근촌이 사장직을 수락한 것은 개인의 영달을 위한 부역이 아니라 민족 기관지의 명맥을 잇기 위한 고육지책의 성격이 강하다. 그는 사장과 주필, 편집국장을 동시에 겸임하며 조선총독부가 신문사를 친일파의 손에 넘기려는 시도를 몸소 원천 차단했다. 비록 임전보국단 간부 명단에 이름이 오르기는 했으나 그가 구체적으로 친일 행위를 실천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적의 압력 속에서 민족 언론을 지켜내기 위한 방어적 경영의 결과로 해석하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한다.
근촌은 일제의 회유와 압박에 굴하지 않고 언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강제 폐간의 길을 택하며 끝까지 저항했다. 1940년 조선총독부는 거액의 보상금을 제시하며 자진 폐간을 종용했으나 근촌은 민족의 자존심을 걸고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결국 동아일보는 강제로 폐간됐고 그 과정에서 근촌은 또다시 옥고를 치르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만약 그가 일제에 영합할 뜻이 있었다면 보상을 챙기고 안락한 삶을 살았겠지만 그는 민족을 위해 고난을 자처했다. 강제 폐간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버틴 행위는 그 자체가 일제에 대한 강력한 항거이자 민족 정신의 고귀한 수호였다. 폐간 이후 그는 신문사 사장직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일제의 모든 요구를 거부하며 철저한 은둔 생활을 이어갔다.
신문사 사장 퇴임 이후의 삶을 정밀하게 살펴보면 그가 일제에 협력한 흔적은 역사적으로 전혀 발견할 수 없다. 그는 일제가 강요한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며 민족의 자존심과 기개를 지킨 진정한 선비의 표상이었다. 그가 남긴 한시들에는 망국의 한과 변치 않는 절개가 고스란히 담겨 있어 그의 굳건한 내면세계를 짐작하게 한다. 1943년 단파방송 청취 사건으로 고초를 겪은 홍익범 선생은 취조 과정에서 근촌을 끝까지 믿고 상의했다고 증언했다. 독립운동가인 홍익범 선생이 근촌을 전적으로 신뢰했다는 사실은 그가 친일파가 아니라는 가장 강력하고 확실한 방증이다. 이러한 삶의 궤적은 근촌이 일제 말기라는 암흑기에도 결코 민족적 지조를 굽히지 않았음을 명명백백하게 증명하고 있다.
1929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참가한 한민족
대표단. 왼쪽부터 백관수, 송진우, 윤치호, 유억겸, 김활란. 문화일
보 자료사진
3. 가문의 영광과 학술적 증명
근촌의 집안 내력을 살펴보면 그가 친일의 길을 걸었을 것이라는 의심이 얼마나 부당하고 허구적인지 더욱 명확해진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독립운동가들을 다수 배출한 명망 높은 애국 지사의 가문으로 학계와 사회에서 널리 인정받는다. 사촌 형인 백인수 선생(애국장, 1990)은 경술국치에 항거해 자결했으며 손자 항렬인 백정기(독립장, 1962) 의사는 구국에 헌신했다. 또한 백정기 의사의 아우인 백진수 선생(애족장, 1990) 역시 독립운동에 앞장서며 가문의 고귀한 독립 정신을 계승했다. 이처럼 온 집안이 독립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배경 아래서 근촌만이 민족을 배반했다는 가정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근촌의 친족 가운데 여전히 포상을 기다리는 지사들이 많다는 사실은 이 가문의 우국충정이 얼마나 깊은지를 증명한다.
근촌을 향한 근거 없는 친일 의혹이 학술적으로 이미 해소됐다는 결정적 증거는 2009년 발간된 ‘친일인명사전’에 있다. 민족문제연구소 등 전문 기관의 엄격하고 정밀한 검증 과정을 거친 이 사전에서 근촌의 이름은 최종적으로 제외됐다. 이는 역사학계가 그의 동아일보 사장 역임과 임전보국단 명단 등재를 자발적인 친일 행위로 간주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당시의 행적들이 부역이 아니라 민족 기관지를 보존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비적 선택이었음을 전문가 집단이 인정한 셈이다. 따라서 이미 학술적으로 소명된 과거의 이력을 빌미로 서훈을 미루는 것은 명백한 행정적 오류이자 역사의 실례다. 사실에 근거한 정밀한 검토 결과 근촌은 친일의 굴레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인물임이 역사적 공론으로 확정됐다.
4. 건국의 설계와 마지막 충절
해방 이후 근촌은 대한민국 건국의 설계자로서 자유민주주의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민족적 차원의 핵심 공헌을 세웠다. 그는 한국민주당 창당을 주도하고 반탁 운동의 선봉에 서서 신생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제헌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대한민국 국호를 확정하고 제헌 헌법 초안 작성을 총괄적으로 진두지휘했다. 농지개혁법을 비롯한 근대적 법체계 수립에 기여한 그의 업적은 독립을 넘어 건국의 토대를 닦은 위대한 행보였다. 이후 이승만 정권이 독재의 길로 들어서자 그는 야당의 길을 택하며 의회주의와 법치주의 수호에 평생을 바쳤다. 그는 권력에 안주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의 올바른 민주 헌법 질서 확립을 위해 헌신했던 참된 정치가의 전형이다.
평양 열사릉의 백관수 선생 묘비
특히 강조하고 싶은 사실은 근촌이 민족 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한 반민특위 활동의 법적 근거를 마련한 주인공이라는 점이다. 그는 반민족행위자 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는 데 가장 앞장섰던 국회의원 중 한 분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친일파를 단죄하려 했던 장본인이 정작 자신은 친일파로 의심받고 있다는 사실은 역사의 지독하고도 서글픈 역설이다. 만약 그에게 조금이라도 떳떳하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면 결코 그토록 준엄하고 서슬 퍼런 법을 앞장서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결백한 양심과 당당한 행적이 있었기에 민족의 반역자들을 처벌하는 엄격한 일에 주저함이 조금도 없었다. 이러한 근촌을 후세가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로 의심하는 것은 그의 생애와 신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무지한 행태다.
2002년 확인된 기록에 따르면 근촌 백관수 선생은 납치된 지 불과 3개월 만인 1950년 10월 25일에 북한 땅에서 타계했다.
6·25 전쟁 중 발생한 납북 과정에서도 근촌은 대한민국의 지도자로서 고결한 절개를 끝까지 유지하며 장렬하게 생을 마쳤다. 북한 당국은 그의 상징성을 이용하기 위해 전향을 강요했으나 그는 목숨을 건 저항으로 적의 회유를 단호히 거부했다. 2002년 확인된 기록에 따르면 그는 납치된 지 불과 3개월 만인 1950년 10월 25일에 북한 땅에서 타계했다. 이는 그가 적의 감언이설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대한민국 공직자의 자존심을 지키며 의연하게 죽음을 맞이했음을 보여준다. 독립과 언론 수호, 건국과 호국으로 점철된 그의 삶은 오직 조국에 대한 일편단심의 충절이라는 하나의 선으로 연결된다. 국가 보훈처는 이제 지체 없이 근촌 백관수 선생에게 독립 유공자 서훈을 추서하여 역사의 정의를 분명히 세워야 한다.
<출처 : 백승종 역사학자, “ ‘2·8독립선언 주역’임에도 홀대 당한 근촌 백관수 선생 서훈 통해 민족 정기 세우고 국가 책무 다해야”, 문화일보 정충신 선임기자, 2026.4.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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