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종교계 신년사와 수사학
2012.01.04 06:40 |
조회 9971
[노트북을 열며] 종교계 신년사와 수사학
신준봉문화스포츠 부문 차장
이런 ‘관록’에 비하면 수사학은 많은 경우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특히 ‘화려한’ 같은 형용사와 함께 쓰일 때 알맹이 없이 겉만 번지르르한 말잔치쯤으로 간주되기 일쑤였다. 수사학에 대한 푸대접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으로부터 비롯됐다. 그는 수사학이 실재(reality)보다 외양에 만족하고, 지식보다는 여론을 전달하려 하며, 말을 교묘히 사용해 권력을 쟁취하려는 정치적 도구라고 공격했다.
수사학을 두둔한 건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인간 세상이 필연보다는 우연(contingency)으로 가득 차 있다고 봤다. 수없이 마주치는 선택의 순간에 사람은 이전과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어서다. 수사학이 중요한 건 그래서다. 수사학은 여론에 바탕을 둔 논의를 통해 선택을 앞둔 사람의 심사숙고 과정에 개입하는, 열린 가능성의 언어 전략이다. 상대방을 설득하기 위해 공들여 말을 선택하고 배열한다. 플라톤이 지적한 약점은 이래서 오히려 강점이 된다.
새해 벽두부터 수사학 얘기를 꺼낸 이유는 지난해 말 잇따라 발표된 국내 종교 지도자들의 신년사 때문이다. 종교 지도자가 사용하는 언어는 종교별로 크게 다르다. 조계종 총무원장 자승 스님의 신년사가 한자를 적절히 사용해 고풍스러우면서도 푸근하다면, 천주교 정진석 추기경의 신년사는 보다 일상 언어에 가까워 자상한 느낌을 준다. 종교계 신년사의 수사적 습관은 각 종교가 품고 있는 사상 체계 사이의 차이만큼이나 다채롭다.
올해 신년사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한반도의 주요 현안에 대한 언급이 많다는 점이다. 김정일의 사망에 따른 남북관계의 향방,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 등이 자주 거론됐다.
증산도의 신년사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점은 “우주의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하추교역기(夏秋交易期)”라고 진단했다. “천지의 질서가 바뀌고 사람개벽을 하는” 중요한 시기라는 것이다. 원불교의 신년사는 제목이 아예 ‘지도자의 길’이었다. 종교 지도자는 물론 새로 뽑힐 정치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품성과 덕목을 밝혔다. 조계종의 신년사는 밝은 지혜의 눈으로 일궤십기(一饋十起), 한 끼 밥을 먹다가도 필요하다면 열 번이라도 기꺼이 일어나는 부지런한 지도자를 뽑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천주교는 현안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다. 하지만 “특별히 새해에는 우리가 모두 지혜로운 삶을 살기를 기원한다”며 에둘러서 할 말을 했다.
종교 지도자들의 신년사가 반드시 해당 종교의 신자들만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의 영적·정신적 지도자로서 그들의 언어는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다. 그들의 신년사가 알맹이 없는 플라톤의 수사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유권자인 우리가 그걸 결정할 수 있다.
신준봉 문화스포츠 부문 차장
전체 5,456건 (5/364페이지)
5396
<특별기고> 3.8민주의거 66주년을 기념하며
2026.03.10,
조회 1291
[역사공부방]
신상구
<특별기고> 3.8민주의거 66주년을 기념하며 &nb...
5395
쿠르드족의 비애
2026.03.09,
조회 814
[시사정보]
신상구
쿠르드족의 비애 미국과 이...
5394
中 6대 미래기술 선언과 한국의 험로
2026.03.09,
조회 835
[시사정보]
신상구
中 6대 미래기술 선언과 한국의 험로 지난 4일 정치협상회의의...
5393
스물아홉 요절 기형도 시인, 한국 시의 계보를 잇는 시인으로 .
2026.03.07,
조회 809
[좋은글]
신상구
스물아홉 요절 기형도 시인, 한국 시의 계보를 잇는 시인으로. 1989년 3월 7일 새벽 스물아홉 살 시인 기...
5392
행복이란 파랑새
2026.03.06,
조회 760
[좋은글]
신상구
&nbs...
5391
희망이 동난 시대, 우린 어디로 가는가
2026.03.06,
조회 1439
[역사공부방]
신상구
희망이 동난 시대, 우린 어디로 가는가 드넓고 황량한 어느 사막 한복...
5390
한국의 영원한 벗, 스코필드 박사
2026.03.04,
조회 1430
[역사공부방]
신상구
&nbs...
5389
이란 사태와 한반도
2026.03.03,
조회 858
[시사정보]
신상구
이란 사태와 한반도 ...
5388
이재명 대통령 제107주년 3·1절 기념사
2026.03.02,
조회 877
[시사정보]
신상구
[전문] 이재명 대통령 제107주년 3·1절 기념사 존경하는 대한국민과 700만 재외동포...
5387
신조어 제조기 월가
2026.02.27,
조회 886
[시사정보]
신상구
신조어 제조기 월가 미국 월가의...
5386
이게 뭔가
2026.02.27,
조회 746
[좋은글]
신상구
그림 들고 목포 찾은 서울 화가 남농은 표정 굳은 채 “이게 뭔가” 스승 그림 똑같이 그려도 불호령 “시방 뭣하냐, 니 그림 그려야지” 누구도 못 보는 지점 슥 짚어줘 ...
5385
빼어난 문장으로 애국하고도 부당한 권력에 부역 오명
2026.02.27,
조회 1354
[역사공부방]
신상구
빼어난 문장으로 애국하고도 부당한 권력에 부역 오명 고려 말, 최영은 용맹스러운 장수, 용장...
5384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 자처… "여자 친일파 거두" 배정자
2026.02.27,
조회 1316
[역사공부방]
신상구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 자처… "여자 친일파 거두" 배정자 1949년 2월 18일 반민특...
5383
연일 폭등 주가에 가려진 차가운 민생 경제
2026.02.27,
조회 906
[시사정보]
신상구
연일 폭등 주가에 가려진 차가운 민생 경제 코스피 지수가 6000선을 돌파한 지 하루 만인...
5382
中國은 우리의 어떤 이웃인가
2026.02.26,
조회 1334
[역사공부방]
신상구
中國은 우리의 어떤 이웃인가 1950년 10월 들어...




댓글 0
댓글 내용을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