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변호사·변혁운동가 조영래 열사

2025.12.09 21:54 | 조회 1800

                        저

                       처절한 불길을 보라

                       저기서 노동자의

                       아픔이 탄다

                       저기서 노동자의 오랜

                       억압과 죽음이 탄다

                       아아, 노예의 호적을 불살라

                       끝없는 망설임도 마침내 끊겨버린

                       저기서

                       노동자의 의지가

                       노동자의 저항이

                       노동자의 자유가 불타오른다. (주석 1)

 

  조영래 열사는 1947년 2월 4일 대구시 대봉정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비누와 가루치약 등을 만드는 소상공인이었다. 대구초등학교에 입학하고 5학년 되던 해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하여 수송초등학교로 전학했다. 졸업 후 경기중학교와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경기고 3학년 때 정부의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나섰다가 정학처분을 받았다.

 

  그는 정학처분에도 굴하지 않고 이듬해 경기고를 수석 졸업하고 1963년 서울대학교 전체 수석으로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서울대 재학 중 박정희 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협정비준반대, 삼성의 밀수규탄, 대학생 교련실시 반대, 3선개헌 반대운동의 중심에 섰다. 제13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1971년 11월 12일 중앙정보부가 조작한 '서울대생 내란예비음모사건'으로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조영래는 거의 모든 시위에서 중심에 있었고, 많은 유인물이나 백서, 서울대 총학생회 이름의 선언문들을 직접 썼다. 1학년 때 한일회담 반대시위로 그는 제적 대상이 됐다가 '수석입학자'에 대한 배려로 구제됐다. 그보다 1년 늦게 입학한 장기표 씨는 "60년대 초반 문리대학이었던 서울대 학생운동의 무게 중심이 후반기 법대로 옮겨지는 계기가 조영래였을 것" (주석 2)이라 했다.

   1973년 출소하여 이번에는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로 수배되었다. 그는 수배 중에도 많은 일조영래는 수배중인 몸으로 여러 가지 일을 많이 했다. 그때 통일사회당을 이끌었던 김철(金哲)이 펴낸 <우리의 민족 조선>이라는 책에 수록된 '프랑크푸르트선언'을 비롯해 여러 건의 문헌을 정리·번역한 것이 조영래였다. 1975년에는 감옥에 있는 김지하와 여러 번에 걸쳐 힘겨운 교신을 통해 김지하의 <양심선언>을 집필했다. 1976년에는 저 유명한 <전태일 평전>을 탈고했다. 엄혹했던 시절 수배 속에서도 그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주석 3)

 

▲<전태일 평전> 책 표지1983년 전두환 5공 정권 시절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지만 저자 이름을 밝힐 수 없었다. 87년 6월 항쟁 이후에 민주화의 바람을 타고 1991년 개정판을 낼 때 저자가 인권변호사 조영래였음을 밝혔다. 조영래 변호사는 개정판 발간을 앞두고 1990년 12월 폐암으로 작고했다. <전태일 평전>에 점심을 굶는 어린 여공들에게 버스차비로 풀빵을 사주는 청년 전태일의 따뜻한 인간애가 펼쳐저 나온다. ⓒ 하성환


  완성된 <전태일평전>은 국내에서 출판이 어려워 일본에서 먼저 출판되었다. 그는 저자 이름을 밝히지 않았고, 국내에서는 1983년 돌베개 출판사에서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뒤늦게 출간되었다. 1990년 가을 그의 이름으로 증보 출간되었을 때, 그는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는 1983년에 시민공익법률사무소를 설립한 이후, 1984년 망원동 수해 주민들의 집단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시작했다. 1984년 대홍수로 서울 망원동 5,000여 가구가 침수당한 사건에 무보수로 참여해 3년에 걸친 법정 공방 끝에 '천재'가 아닌 '인재'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이 사건은 사상 초유의 대규모 집단소송이었다. 그는 이 사건 가옥침수 원인은, 첫째 망원유수지 일체의 유수지 시설물을 점유하는 서울특별시의 그 설치, 관리상의 잘못과, 둘째 주식회사 현대건설의 부실공사, 셋째 유수지 시설물을 관리하는 서울시 소속 공무원의 수재발생 방지노력 태만에 있다고 주장, 각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장을 법원에 제출, 승소를 이끌었다.

   조 열사는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피해자 권익숙을 변호하고 가해자 문귀동에 대한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는 등의 활동으로 인권 변호사로서 큰 활약을 했다. 고문 피해자 권인숙 양을 접견하면서, 또 검찰과 관계기관 대책회의가 이 사건을 은폐하는 시도를 보면서, 이 사건이 부도덕한 군사독재 정권이 몰락하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는 것과 또한 그것만이 권양을 살리는 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대규모 변호인단을 구성, 부천경찰서 서장과 고문 형사 등 성고문 관련자들을 고발했다. 변호인단이 제출한 고발장에 의하여 검찰은 수사를 시작했으나, 예상 밖으로 문귀동에 대하여 기소유예 처분을 내리고, 나아가 수사결과 발표 기자회견장에서 권양에 대한 악의적인 모함과 중상으로 가득 찬 '공안당국의 분석자료'라는 유인물을 배포하자, 그는 즉각 이에 대처하여 변호인으로서는 다소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는 기자회견까지 자청하여 검찰 수사 결과의 허구성과 수사과정에서의 의혹을 낱낱이 밝혔다.

   조영래가 변호사가 되어 활동한 7년 동안에 이룩한 것은 비단 이러한 개별사건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었다. 1986년 5월 1일 발인 날에 맞추어 1985년의 <인권보고서>가 발간되었다. 이는 변협 역사상 초유의 그리고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그 이후 해마다 <인권보고서>가 발행되었는데, 어쨌던 변협의 인권옹호 활동의 결산이라 할 이 <인권보고서> 발간의 산파역이자 주역이 조영래였다. 그가 변협 활동을 통해 이룩한 주요한 업적 중의 하나라 할 수 있다. (주석 4)

   '탁월한 인권변호사, 발군의 변혁운동가' 조영래 열사는 1990년 12월 12일 눈을 감았다. 43세였다. 남양주 화도읍 모란공원에 묻혔다.

 

                                                 주석

1> 조영래, <노동자의 불꽃, 아아 전태일>.

2> 조선희, '탁월한 인권변호사, 발군의 변혁운동가',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3), 한겨레출판사, 1992.

3> 김정남, '짧은 삶, 큰 자취', <이 사람을 보라(1)>, 두레, 2016.

4> 앞의 책, 4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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